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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월 22일 야곱의 우물- 요한 3, 14-21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9-03-22 조회수437 추천수4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예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요한 3,14-­21)
 
 
 
 
니코데모는 바리사이로서 유다인의 최고의회 의원이고(요한 3,1) 명예와 덕을 겸비한 이스라엘의 스승이며(3,10) 예수님에 대해서 남다른 관심을 가졌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유다의 지도자들과 바리사이에게 비난의 대상이었기에 지위가 있는 사람은 누구도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따르기 어려웠습니다. 그는 자신의 명성과 남의 이목 때문에 아무도 없는 밤에 조용히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보고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을 행하는 이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라는 알 수 없는 깊은 번민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3,2 참조). 예수님은 이런 니코데모에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3,14-­15 참조).

광야를 횡단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굶주림과 피곤에 지쳐 하느님을 원망하고 불평을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만 믿으면 고생 뒤에 낙이 올 텐데, 바로 눈앞에 펼쳐진 현실적 고달픔으로 인해 하느님을 의심하고 대들었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불뱀을 보내 수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죽게 됩니다. 그러자 백성은 모세를 찾아와서 도움을 청합니다.
모세는 하느님께 백성을 위해 기도하고 하느님은 모세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불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고 그것을 바라보는 자들은 살 것이라고 하셨기에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게 됩니다. 그리고 뱀에게 물린 자들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게 되었습니다(민수 21,4­-9 참조). 하느님은 이처럼 벌을 주시면서도 그 옆에는 항상 자비와 은총도 함께 마련해 두십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는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라는 말씀대로 죄가 세상에 군림하여 죽음을 가져왔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인간의 죽음이 새로운 삶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가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는데 원망과 불평은 뱀, 곧 사탄에게 물리는 치명적인 죄입니다. 원망과 불평으로 사탄에게 물린 자들은 크게는 영적인 죽음에 이르게 되고 작게는 엄청난 고통을 당하게 되는 일이 더러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망과 불평은 내게 신뢰가 없다는 것을 드러내며 하느님이나 이웃보다 나 자신에게 더 깊은 관심과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표지로 ‘뱀’에게 물린 것처럼 깊은 상처를 입힙니다.

그런데 구리로 만든 뱀을 보고 옛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살듯이, 십자가에 달린 분을 보면 우리도 구원을 얻게 된다는 말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죄로 얼룩진 자신의 숨겨진 모습을 하느님의 빛 아래 정직하게 대면해야 근원적인 치유와 구원이 가능하다는 뜻을 담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광야에서 모세가 높이 든 구리 뱀이 원망과 불평으로 재앙을 자초한 내 모습을 상기시켜 주듯 십자가에 달려 높이 들려진 예수님도, 잘 보면 사실 내가 보고 싶어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주는 거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곧 십자가를 쳐다보면 그 앞에서 “바로 내 죄가 죄 없는 저 분을 저렇게 만든 것이로구나!” 하고 가슴을 치며 나와 우리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죄의 세력을 인식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 비로소 십자가에 달린 분의 구원과 치유의 힘이 나에게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믿는 자는 성령의 능력으로 죄악의 독이 해소되고 구원을 받고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심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주어졌으나 예수님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라는 말씀처럼 누구든지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는 자는 구원을 얻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에페 2,8­-9) 과연 우리의 공로나 선행이나 노력으로 구원 받았으면 자랑할 수 있겠지만 사실 우리의 노력이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우리에게 전적으로 거저 주어졌습니다. 모든 참된 선물이 그러하듯 하느님의 구원 역시 예수님을 통해 ‘공짜’로 주어진 것입니다.

니코데모는 평생을 율법을 지키며 경건하게 살았기에 예수님이 행하신 표징을 보고 감격했습니다. 기적이 넘쳐나고 생명의 역사가 넘쳐난 것을 보고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의 아들이요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인 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 왔다가 율법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새롭게 태어나 구원을 받는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죄인들은 어두움 가운데서 살 뿐만 아니라 어두움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의 죄가 드러나는 빛으로 오기를 거절합니다.(요한 3,19-­20 참조)

니코데모는 어둠에서 나와 마침내 위로부터 태어나 새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니코데모는 혼란의 어두움 속에서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나중에 그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지도자들에게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7,45-­52 참조)라고 확신에 차서 예수님을 변호합니다. 이 모습에서 우리는 니코데모가 빛 가운데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자 공개적으로 대낮에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기 위해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찾아온 것을 볼 때 그는 어둠에서 빛으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19,39 참조).

요한복음 저자가 구리 뱀 사건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연관시킨 이유는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3,17 참조)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인간의 죄를 넘어서는 하느님의 자비, 당신의 외아들까지 희생하는 끝없는 사랑,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무한한 은총, 이것이 십자가가 지닌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과 태도는 기쁨과 충만함으로 물들 수밖에 없습니다.
김혜경(한국가톨릭여성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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