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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9-03-24 조회수697 추천수11 반대(0) 신고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 윤경재

예루살렘의 ‘양 문’ 곁에는 히브리말로 벳자타라고 불리는 못이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는,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그에게 물으셨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그 뒤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시자 그에게 이르셨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요한 5,1-16)

 

 벳자타라는 히브리말은 은혜의 터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1888년에 예루살렘 성곽 안에서 그 터가 발굴되었습니다. 그 후 예루살렘 성지순례의 필수 코스가 되었습니다. 저도 성지순례 때 발굴된 못 자리를 바라보며 38년간이나 도움을 기다리며 들것에 누워있었을 마비병자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확실한 기약도 없이 물이 출렁이기만을 기다렸고, 그나마 첫 번째로 물에 들어가야만 치료가 되는 상황에서 무작정 기다리는 그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상상하면 끔찍하였습니다. 일등만 성공한다는 말인데 몸이 성해 자신이 있는 병자들만 남아서 기다렸을 겁니다. 그동안 많은 병자가 혹시나 하고 못가에 왔다가도 지레 겁을 먹고 자리를 떠났을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마비병자가 무슨 힘으로 38년을 지켰을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나라면 어땠을까 생각하니 답답하기만 하였습니다. 그는 행여나 하는 마음만으로는 그 긴 세월을 견디지 못했을 겁니다. 하느님께서 구원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굳은 인내심과 믿음을 지녔던 사람입니다. 교부들은 이 병자를 우리가 따라야할 인내의 본보기라고 설명합니다.

 성경에는 또 다른 38년의 의미가 있습니다. 신명기 2,14절에서 주님의 명령을 의심하였던 군사들 한 세대가 사라지고 새로운 세대가 나타난 시간입니다. 의심의 뿌리를 완전히 뽑는데 걸린 시간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집트를 탈출한 후 가나안에 들어가라는 주님의 명령을 곧이곧대로 믿지 못하고 열두 명을 보내 정찰하였습니다. 정탐에서 돌아온 선발대의 말만 듣고 막강한 아모리인들과 싸우면 죽을까 겁을 먹었습니다. 그들은 곧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38년 동안 방황하였습니다. 주님의 도움으로 승리할 것이라는 말씀을 믿지 못한 채 인간적 의심만으로 따지고 들고 망설인 시간이었습니다.

 믿음과 의심, 전혀 다르게 다가오는 두 38년의 의미를 새기며 요한복음서 9,3절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됩니다.

 일등이 아닌 꼴찌에게 찾아오시는 예수님과 승리, 즉 일등이 되지 못할까 의심하여 주저앉았던 유대인의 마음을 새롭게 잡아 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오버랩하니 저절로 하나의 이미지가 그려집니다. 용기와 믿음을 북돋워주시는 주님, 손을 내밀어주시는 주님의 모습이 분명히 떠오릅니다.

 하느님의 일을 바라보는 눈을 갖춘다면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결국 이루어진다는 뜻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온몸이 마비되어 꼼짝도 못하는 병자에게 “건강해지고 싶으냐?”라고 왜 물으셨는지 어렴풋이 알아듣게 됩니다. 또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라고 전혀 불가능하게 생각되는 명령을 내리셨는지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동안 그는 일어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의 인내와 믿음에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용기였습니다. 그것은 믿음과 인내에 대한 격려였습니다. 믿음과 인내에 용기가 더해져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믿음과 인내에 용기가 곁들여질 때 불가능하게만 보이는 어떤 일도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꼴찌에게 다가가 격려와 용기를 주시는 예수님께서는 단 한 명에게만 기적이 일어난다는 옛 약속이 옳지 않다고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수많은 꼴찌들이 우승자를 위한 배경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일등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저 마비병자를 고치시러 벳자타 못가에 나가신 것이 아닙니다. 육체의 병고보다 더 큰 생명을 가르치시러 나가셨습니다. 하나보다 전부를 통찰하는 눈, 물질보다 그것을 낳은 영혼을 통찰하는 눈을 보이시러 나간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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