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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118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3-27 조회수475 추천수2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사순 제4주간 금요일]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1-2.10.25-30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돌아다니셨다. 유다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다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2 마침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가까웠다. 10 형제들이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도 올라가셨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셨다.

25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26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27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28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29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30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복음은 중간 구절이 많이 생략된 복음입니다. 이렇게 생략된 구절들은 독서의 편의를 제공하려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공교롭게도 난처한 구절들이 간혹 생략되고 있음을 발견하곤 합니다. 오늘 생략된 구절에도 평소에 의문으로 남겨 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형제들에게 "너희나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라. 나는 이번 축제에는 올라가지 않겠다. 나의 때가 아직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갈릴래아에 머무르셨으나(요한 7.8-9) 형제들이 떠난 후에 오늘 복음처럼 홀로 예루살렘을 가셨습니다. 먼 길을 가려면 형제들과 함께 오순도순 사이좋게 가셔야 하는데 우리의 상식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하셨으므로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예수의 생애]의 저자 에르네스트 르낭은 형제들이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매수를 당하였고 이를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 일부러 형제들과 동행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고 있지만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또 일부에서는 형제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등 별별 억측을 자아내게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시켜 주는 해설을 불민한 탓에 아직 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해되지 않는 말씀 속에 소중한 가르침이 담겨 있는 경우를 자주 발견하므로 이런 부분들이 오히려 좋은 묵상의 소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오늘 묵상을 통해서 이에 대한 의문을 해소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초막절과 파스카축제, 그리고 오순절은 유대민족의 3대 축제입니다. 초막절은 추수감사절의 성격이 있으며 또 광야에서 천막을 치고 살았던 그때를 기억하기 위해서 천막생활을 체험하는 축제입니다. 예수님이 축제에 참석하지 않고 고향에 머물고자 하신 이유는 복음을 곳곳에 전파하지 못하여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으므로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음에도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는 눈에 가시 같은 분이지만 유대교 지도자는 민중들의 눈치를 보며 아직은 예수님을 함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국민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언론인마저 마구잡이식으로 잡아들이고 있습니다.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인권위마저도 축소시켜서 국제기구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으며 PD수첩 제작진도 잡아 드리는 것을 보면 이제는 정권에 협조하지 않는 언론들을 탄압하고 있습니다. 아마 뜻있는 분들은 이런 처사에 대하여 울분을 느낄 것이며 그 울분들은 어떤 형태로든 표출 될 것입니다.

이러한 울분은 누가 옆에서 사주하여 생겨나는 것도 아니며 오직 각자의 양심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는 이러한 바른 양심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성이며 본성입니다. 성령을 저는 이러한 우리의 바른 양심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측은지심으로 병자들을 치유해 주신 모습들은 성령이 온전하게 발현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며 저희들은 잘못된 욕망과 육신의 안위 때문에 성령을 잠재우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묵상의 편의상 단락으로 나눠서 묵상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하셨습니다. 이제야 예수님이 형제들에게 '나는 이번 축제에는 올라가지 않겠다.' 하신 말씀은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축제에 참석하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축제에 오신 것은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하신 말씀처럼 성령의 뜻을 따랐다는 말씀입니다. 당신의 안위를 위해서 갈릴래아에 남아 있는 것은 양심이 허락하지 않으셨기에 오직 양심에 따라 행동하셨다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이런 양심이 바로 성령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다른 분들은 하느님을 모르는데 예수님만 하느님을 알고 계신다고 하신 말처럼 들리고 또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므로 우리는 미리 짐작하여 이런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서가 쓰여진 당시만 해도 삼위일체 교리는 형성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으로 지금의 교리와는 무관하게 당시의 독자 입장에서 이 말씀을 이해하여 보려고 합니다. 나를 보내시는 분은 참된 진리이며 너희들이 진리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이런 뜻으로 일단 묵상해 봅니다.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흔히 범하는 오류는 모든 말씀을 교리적으로 이해하는데 있습니다. 성경해석은 성경 말씀을 이성적으로 이해하여 그 속에서 삶의 교훈을 찾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교리에 의해 미리 답을 정해놓고 그 답에 맞게 성경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런 태도는 경전을 묵상하는 자세가 아니라 할 것입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교리 공부를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의해서 교리가 형성되었으며 교리에 의해서 성경이 쓰여진 것이 아님으로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는 교리의 선입관을 일부러 배제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하신 말씀도 나는 진리를 알고 있기에 진리의 화신으로 왔으며, 내가 너희들에게 이렇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도 오로지 진리를 알려주기 위함이며, 내 양심이 침묵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으로 정리해 봅니다.

예수님은 떠나셨지만 예수님이 알려주신 진리는 우리에게 영원히 기억될 것이므로 이를 성령으로 의인화하여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요한 14,26)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성령이며 또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모습들을 기억하여 우리가 이를 실천할 때에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므로 성령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서 성령이 솟아나는 것으로 묵상하고 있습니다.

 지고지선하시고 절대 진리이신 분이 아버지 하느님이며. 지고지선한 진리적 삶을 살아오신 분은 예수님이며,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위들을 우리가 기억하여 이를 실천할 때에 성령이 충만한 삶이 되므로 삼위는 지고지선과 진리의 관점에서 일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분' 당연히 아버지 하느님입니다. 진리로 이해하여도 아버지 하느님은 절대 진리이므로 그 의미는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 자신의 잘못된 욕망을 모두 죽여서 하느님이 주신 영성을 제대로 발현시키는데 있습니다. 영성을 잠재우는 자는 측은지심이 생겨날 수 없으므로 침묵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끝으로 오늘 묵상을 마칩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은 죽음의 위험을 무릎 쓰고 예루살렘을 가셨습니다.
당신의 안위에 대한 염려가 왜 없으셨겠습니까?
그래서 가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침묵할 수 없어 그 길을 가셨습니다.
저희도 이런 가르침을 따를 수 있도록,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할 수 있도록 
잠자는 성령을 깨워주시기를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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