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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다(마르코11,1-33)/박민화님의 성경묵상
작성자장기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3-27 조회수566 추천수4 반대(0) 신고
2009년 3월 27일 금요일 마르코복음11장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예고를 세 번이나 하시고 예루살렘에 가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잡혀서
수난 받고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여 천국 완성을 하시는 과정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존재하는 것처럼 죽음도 존재하는데
죽음은 죄의 벌로써 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우주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관리할 아담과 하와를 원죄없이 창조하였지만,
하느님 말씀에 불순종하여 죄를 지음으로써
죄의 벌로 영(영혼,르하흐)은 죽었으나
육은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아담 하와를 구원시키기 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아 내는 것이
하느님 입장에서는 아담 하와를 구원시키기 위한 십자가 사건이지만,
아담 하와가 볼 때는
수난 받고 죽고 부활하기 위해서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약을 보면 의로운 욥도
고통과 수난을 통하여 심령이 죽는 구약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우리 육은 죽기 전에 고통이 오기 때문에
수난과 죽음을 가급적이면 피하려고 하지만,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우리들의 심령이 죽어야만 부활이 오는데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 육은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 심령이 부활하는 것이 구원인데,
죄에서 죽고 부활하기 위해서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으로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계실 때,
내 안에 있는 생명이신 그리스도 때문에
죽지 않고 영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살아갈 때,
우리들의 체질이 예수님의 체질로 변하여
우리들의 심령도 예수님의 심령으로 변화되는 것이
부활이고 영원한 생명인 것입니다.
 
내 안에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계시면 우리들은 영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씀을 창세기부터 요한 묵시록까지 읽고 묵상하며,
주일 미사예배에 참여하여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은
우리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갈바리아 산에서 희생 제물이 되어
우리 죄를 속량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인데,
 
요한복음 14,6에서
"나는 길이요.진리요.생명이다."라고 하셨는데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는데,
하느님은 공의의 하느님이시고, 사랑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인간들의 죄를 무조건 사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양으로 목숨을 바쳐
죄를 대신해 주시는 것인데,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직후
성령으로 예수님의 머리에 비둘기로 나타나시는 것을 보고,
"세상의 죄를 짊어 지고 가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가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계시해 주시기 위하여
마르코 복음에서는 많은 기적을 통하여 증거해 주는데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은
어린 나귀는 복음이신 예수님을 상징하고,
어미 나귀는 율법인 구약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성경도 시공간이 없고 현재이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때마다 복음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오시는 것입니다.
 
1 그들이 예루살렘 곧 올리브 산 근처 벳파게와 베타니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 둘을 보내며
2
말씀하셨다. “너희 맞은쪽 동네로 가거라. 그곳에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는 것을 곧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을 풀어 끌고 오너라.
 
설명:
이사야서 1,2에
"하늘아, 들어라! 땅아, 귀를 기울려라!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아들들을 기르고 키웠더니 도리어 나를 거역하였다.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제 주인이 놓아 준 구유를 알건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
라고 하셨는데
 
"하늘아, 들어라! 땅아, 들어라!" 하는 말도
하늘이 귀가 있고 땅이 귀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은 하느님의 백성 영의 자녀들을 상징하고
땅은 이방인 육의 자녀들을 상징하고,
나귀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과 영의 자녀들이 나귀를 타며,
소는 육의 자녀들과 백성들이 타는 것이며,
어미 나귀는 율법을 상징하고,
새끼 나귀는 예수님과 복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 구유에서 태어나신 것도
육안으로 보면
아기 낳을 장소가 없기 때문에
마굿간에서 예수님이 태어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차원을 달리해서 보면
말 구유에서 태어나신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성도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의 양식으로 오셨다는 것을 상징하는데,
 
예수님께서 '
"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생명의 빵이요, 생명의 양식이기 때문에
내 살과 피를 먹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요한복음 6,54),
 
예수님께서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복음으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 오시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3 누가 너희에게 ‘왜 그러는 거요?’ 하거든, ‘주님께서 필요하셔서 그러는데 곧 이리로 돌려보내신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
4
그들이 가서 보니, 과연 어린 나귀(예수님과 복음상징) 한 마리가
바깥 길 쪽으로 난 문 곁에 매여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것을
푸는데,
5 거기에 서 있던 이들 가운데 몇 사람이, “왜 그 어린 나귀를 푸는 거요?” 하고 물었다.
6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일러 주신 대로 말하였더니
그들이 막지 않았다.
7 제자들은 그 어린 나귀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그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어 놓았다. 예수님께서 그 위에 올라앉으시자,
8
많은 이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다.
또 어떤 이들은 들에서 잎이 많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깔았다.
9
그리고 앞서 가는 이들과 뒤따라가는 이들이 외쳤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10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
11 이윽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그곳의 모든 것을 둘러보신 다음,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열두 제자와 함께 베타니아로 나가셨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다 (마태 21,18-19)
 
하느님께서 무화과 나무에게 저주하는 예화가 나오는데
무화과 나무에 열매가 없기 때문에 저주하는 이야기는
육안으로 볼 때는
예수님께서 어렸을 때 무화과를 먹었던 것을 생각할 수 있으며,
예수님께서 배가 고프신데
무화과 열매가 없어서 저주 했다고 볼 수도 있으나,
차원을 달리해서 영차원으로 보면
나무를 의인화해서 무화과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하고,
 참 포도나무는 신약에서 사도들과 성도들을 상징하는데, 
무화과 나무 열매가 없기 때문에
즉 율법에 사는 사람들에게서는 성령의 열매인
사랑 기쁨 평화 등의 열매가 없기 때문에,
저주와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사랑의 열매로 실천하면서
사랑으로 살아 가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
최후의 심판에 기준이 될 수가 있기 때문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12 이튿날 그들이 베타니아에서 나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시장하셨다.
13
마침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멀리서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무엇이 달렸을까 하여 가까이 가 보셨지만, 잎사귀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설명:
육의 양식은 빵과 무화과 열매일 수도 있지만
영의 양식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생명의 말씀입니다(마태복음 4,4).
 
14 예수님께서는 그 나무를 향하여 이르셨다. “이제부터 영원히 어느 누구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 먹는 일이 없을 것이다.” 제자들도 이 말씀을 들었다.

성전을 정화하시다 (마태 21,12-17 ; 루카 19,45-48 ; 요한 2,13-22)
 
성전에 대한 예화가
마태복음에서는 24장에 나오고
마르코 복음에서는 11장에 나오나
요한복음에서는 2장에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이란 성전에 입성하실 때
"호산나!(하느님 저희를 구원하소서)"하고
예수님을 맞아 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시기 질투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마음을 먹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우리들이 마음을 비우고 예수님을 내 안에 모셔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는 성전이 되어야
우리들이 산제물이 되고 성전이 되며,
성령이 거쳐하는 성스러운 감실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 가셔서 환전상들이 소 양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을 꾸짖으면서 상을 엎으시고 하는 것들은
육안으로 볼 때는 예수님이 화내는 것 같지만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께서는
 
소는 성부를 상징하고
어린양은 성자를 상징하고
비둘기는 성령을 상징하는데,
 구약인 율법의 제사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성부 성자 성령의 실체인 나와 복음을 믿고
신령한 영적인 예배를 드려야 구원을 받는다고 안타까워하며
환전상들의 물건파는 것들을 못하게 하시고,
"나를 믿어라!"고 외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우리들 마음 안에
장사하는 성전을 허물어 버리고
복음 말씀으로 새로 지은 성전을 만들어
성령이 거쳐하는 기도하는 하느님 아버지의 집이
우리 안에 세워질 수 있도록 신앙 생활을 합시다.
 
15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그곳에서 사고팔고 하는 자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셨다.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도 둘러엎으셨다.
16 또한 아무도 성전을 가로질러 물건을 나르지 못하게 하셨다.
17
그리고 그들을 가르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설명:
우리들의 마음 안에는 장사하는 성전이 있기 때문에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
나의 육적인 욕망을 다 죽이고 버렸을 때,
복음 말씀으로 새로 지은 기도하는 성전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 8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돌로 쳐 죽이려고 하는 것은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율법으로 보기 때문에 
또한 선악으로 보기 때문에,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는 사람이 돌을 던져라." 라고 말씀하시니까
나이 많은 사람부터 떠나갔는데,
여기에서도 간음한 여인을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선악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율법에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돌로 쳐 죽여야 된다고 보는 것은
죽은 자가 죽은 자를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이나 선악으로 보지 않고 사랑으로 보기 때문에
이 간음한 여인이 간음을 하는 것은
빛이고 생명인 나를(예수님) 만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죄를 지었지만,
이제 율법을 통하여 복음인 나한테 왔기 때문에
죄를 용서 받고 생명으로 빛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 간음한 여인은 이미 율법에 의해서 돌에 맞아
육신은 죽지 않았지만 마음은 죽은 것입니다.
이사건을 통하여 간음한 여인은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
죄을 용서 받고 육신이 살아날 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살아난 것입니다.
 
우리들도 일상생활에서 내가 잘못하거나 부족할 때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난 받고 욕을 먹고 하는 것도
우리들 심령 안에 십자가 사건일 수가 있기 때문에
간음한 여인이 예수님에게서 떠나자 않았기 때문에
 
영육간에 구원을 받는 것처럼 시련이 왔을 때
복음 말씀을 읽고 묵상했을 때,
우리들에게도 죽음에서 생명으로 가는 것입니다.
 
18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그분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군중이 모두 그분의 가르침에 감탄하는 것을 보고 그분을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19 날이 저물자 예수님과 제자들은 성 밖으로 나갔다.

말라 버린 무화과나무의 교훈 (마태 21,20-22)
 
20 이른 아침에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 있는 것을 보았다.
21 베드로가 문득 생각이 나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보십시오. 스승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라 버렸습니다.”
22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느님을 믿어라.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
 
설명:
문자적으로 보면 기도를 많이 했더니
'조그만 산을 불도저가 집을 짓기 위하여 흙을 파다가
바다로 옮겼더라.'고 설명할 수도 있으나,
차원을 달리해서 영차원으로 보면
모세가 율법을 받은 시나이산이, 즉 율법의 산이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신 시온산으로 변하는 것을 말하며,
 
즉 내 안에 율법의 산이 복음 말씀을 읽고 마음이 변하여
복음의 산으로 변화된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데,
시기 질투 미움으로 살아온 내가 복음의 말씀을 읽고,
사랑 기쁨 평화 등의 마음으로 변화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설명:
요한복음 14,14에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청하면 다 이루어 주겠습니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믿고 기도하면, 다 이루어 주시는 때는 각각 다를 수가 있습니다.
우리도 믿고 하늘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25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에 누군가에게 반감을 품고 있거든 용서하여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

예수님의 권한을 문제 삼다 (마태 21,23-27 ; 루카 20,1-8)
 
공관복음인
마태 마르코 루카복음에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계시해 주시는 복음이고,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어 우리 안에 오셔서 이루어지는 복음인데,
마르코 복음에서는 기적을 통하여 
하느님 능력이 예수님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을 많이 보여 주었는데도,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인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 하느님으로 보질 못하고,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서 믿지를 못하고 시험을 하지만, 
단순하고 배우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며 메시아 구세주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믿음 없이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와 오늘날에도 고정관념,
편견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성경이 열리지가 않는 것입니다.
 
 
우리들 안에 있는 고정관념 편견 아집을 버려야만
예수님의 눈으로 사랑의 눈으로 성경을 봤을 때
성경의 말씀을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27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다. 예수님께서 성전 뜰을 거닐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와서,
28 예수님께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에게 한 가지 물을 터이니 대답해 보아라. 그러면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30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대답해 보아라.”
31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말할 터이니,
32 ‘사람에게서 왔다.’ 할까?” 그러나 군중이 모두 요한을 참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군중을 두려워하여,
33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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