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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 안의 죄를 받아들이기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9-03-30 조회수622 추천수8 반대(0) 신고
 
 

내 안의 죄를 받아들이기 - 윤경재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요한 8,1-11)

 

 오늘 복음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태도를 보이시고 과연 우리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보여주십니다. 여러 영성가와 교부께서 이 대목에 대해 묵상하셨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아름다운 묵상이 나올 것입니다.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는 율법은 그녀의 죄가 빌미가 되어 유대 집단에 하느님의 벌이 추가로 내려오는 것을 막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녀의 죄가 자기들과 상관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지금도 지구상 일부 지역에서는 명예살인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일이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습니다. 죄가 외부에서 들어온다고 여기기 때문에 벌어지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입니다.

  인간은 감각을 통하여 우리를 둘러싼 외부 세계에서 지식을 얻습니다. 그것을 이성의 힘이라 여기고 생존에 필요한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거나 이해를 위한 수단으로 체계를 잡아 갑니다. 이성은 생존에 더 없이 필요한 능력입니다.

  인간은 하느님마저 인간의 이성으로 분석할 수 있고 양과 질로 구분할 수 있는 하나의 유형으로 나아가 하나의 ‘존재’로 격하시키려고 한다고 마이스터 에카르트는 날카롭게 지적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은 무를 구별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하느님께서는 무를 초월하고 무 이전에 계신 분이신데 어찌 이성으로 담으려 하느냐고 지적합니다. 이성적 사고는 하느님을 비켜 지나갈 뿐입니다. 상상으로 하느님을 꾸며 놓고 ‘이것이 분명 하느님이다.’라고 주장할 뿐입니다.

  에카르트는 인간의 능력, 즉 지성, 기억, 의지, 감각을 잊음으로써 ‘하느님을 기다리는’ 자유와 고요에 도달하자고 합니다. 그 방법으로 껍질인 자아를 버리고 내면의 영을 드러내고 바라보자고 말합니다. 그것을 가난(비움)과 아드님의 탄생이라고 불렀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죄를 외부에서 찾았습니다. 자기들이 죄에 물들지 않으려면 죄를 차단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것이 율법을 만든 이유라고 보았습니다. 자기들 생각이 맞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주장에 따르겠느냐? 그러면 자기편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런 생각과 행동은 사실상 지금 우리도 물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은 그들에게나 지금 우리에게나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뛰어난 예수님의 지혜를 보여주거나 무한한 용서를 가리키는 대목이기보다 인간 사고의 방법을 재정립하라는 근본적인 뜻을 찾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습니다. 그들도 예수님처럼 몸을 굽히고 아래를 내려다보았습니다. 이 행동은 극도로 흥분한 사람들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호기심을 일으켜 진정시키는 효과를 주었습니다. 인간 내부에 무엇이지 하는 의문을 들게 하여 안으로 눈길을 돌리게 유도하였습니다. 어느 정도 사태가 진정되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본질에다 한 가지 질문을 합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이 질문은 죄의 근원이 외부에서 비롯하는지 아니면 자기 내부에서 생겨났는지 살펴보라는 요구이었습니다. 그러자 나이 든 사람으로부터 한 사람씩 물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자신 안에서 비롯하는 죄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예수님께서는 땅 바닥에 무엇인가 쓰셨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적 행동이었습니다. 은혜는 바위에 깊게 새기고 원수는 모래밭에 적는다는 비유를 떠 올리면 쉽습니다. 그들의 죄를 다시는 문제 삼지 않을 터이니 너희도 그것을 본받으라는 말이었습니다.

  타인의 죄를 용서함으로써 자신의 죄에도 자비를 베풀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 중 하나가 자신의 용서를 확신하는 것입니다. 자기 용서를 완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양심의 가책과 의심과 찜찜함으로 자기기만에 이릅니다.

  이런 질곡에서 벗어나는 길은 먼저 자기를 바라보고 자기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필요성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가 어쩌면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고백처럼 ‘복된 탓’이었다고 감사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와 너 뿐만 아니라 나도 죄를 감사히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부정하고 싶은 유혹에 넘어갈 때 우리는 아무도 용서하지 못하고 자신도 용서하지 못합니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 상황을 고백할 때 주님의 용서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나오는 간음한 여인은 정말로 회개하고 자기를 용서하여 인생의 길을 바꾸었습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아니 죄를 짓지 못하였습니다. 우리의 회개도 이 여인과 같아야 하겠습니다. 먼저 용서를 진정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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