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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지혜로운 기도와 청............차동엽 신부님
작성자이은숙 쪽지 캡슐 작성일2009-04-02 조회수1,209 추천수3 반대(0) 신고

 

 

 

 


 

 

 

 

지혜로운 기도와 청............차동엽 신부님

 

 

 우리는 언어를 잘 사용해야 한다. 언어를 막 사용하면 사람이 억울하게 다치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간혹 우리는 "그런 기도는 틀린 기도야!"라고 단정 짓는다. 이것은  무자비한 단정이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런 기도'를 들어주시기도 하신다.

 '틀린 기도'는 없다. 다만 '수준 낮은 기도'가 있을 따름이다. 사람은 그 자신의 영성적 수준에 따라서 기도를 한다. 처음에는 아무래도 기도의 동기와 목적이 현세적인 것일 수 있다. 그러다가 영적인 눈을 뜨면 점점 기도 지향이 초월적인 것, 곧 하느님을 경외함, 영원한 생명, 지복직관 등으로 고양(高揚)된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수준이 낮은 기도도, 수준이 높은 기도도 모두 인정해 주신다. 눈높이를 맞춰주신다. 그러면서 각 사람의 영적 관심이 점차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 이끌어 주신다.

 예를 들어 보자. 우리는 야베츠의 기도와 아구르의 기도에서 대조되는 수준 차이를 만나게 된다. 야베츠는 하느님께 '현세적인 축복'을 청했던 반면, 아구르는 "오로지 하느님을 잘 섬기고 살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기도를 바쳤다. 그런데 이 두 기도는 응답받았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구약에서 야베츠는 그리 유명하지 않은 사람이다. 역대기 상 4장 9-10절에 그의 기도가 실린 것 외에는 어디에서도 야베츠를 찾아볼 수 없다. 그에 관해 이렇게 기록돼 있다.

 "야베츠는 자기 형제들보다 존경을 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내가 고통 속에서 낳았다'고 하면서 그에게 야베츠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야베츠는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이렇게 빌었다. '부디 저에게 복을 내리시어 제 영토를 넓혀 주시고, 당신의 손길이 저와 함께 있어 제가 고통을 받지 않도록 재앙을 막아 주십시오.' 그러자 하느님께서 그가 청한 것을 이루어 주셨다"(1역대 4,9-10).

 평범해 보이는 이 기도 뒤에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깨닫지 못하고 지나가는 놀랍고 강력한 진리가 숨어 있다.

 첫째, 야베츠는 "부디 저에게 복을 주세요" 하고 기도했다. 히브리어로 '야베츠'는 '고통'을 뜻한다. 성서 시대에 한 사람의 이름은 대개의 경우 그의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그 이름은 순탄하지 못한 미래를 보여준다. 그러나 야베츠 그는 적극적이고 간절하게 하느님께 복을 구했다. 하느님의 복은 구하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야고 4,2).

 복을 꼭 세상의 부귀영화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보다 더 귀한 복들이 많이 있다. 이 복들을 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야베츠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았기 때문에 하느님께 무엇을 달라고 구하지 않았다. 주실 복을 하느님이 결정하시도록 맡겼다.

 둘째, "영토를 넓혀주세요" 하고 기도했다. 우리는 간혹 실패의 경험이 있을 때 '내 인생이 결국 이 지경에 이른 건가? 내 인생은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 것일까?'하고 실망한 적이 있을 것이다. 야베츠는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이보다 더 큰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났어!"라고 용기 있게 다시 일어설 줄 알았다. 그는 자신의 삶이 이미 결정됐다고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영토(領土)를 넓혀 달라고 청했다. 여기서 영토는 단지 땅(土)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지평' 또는 '삶의 영역'을 뜻하는 것으로도 알아들을 수 있다.

 셋째, "주님의 손으로 저를 도와주세요" 하고 기도했다. 우리는 영토(영역)를 넓히기 위해 너무 큰 일을 시도할 때도 있다. 때로는 실패도 한다. 야베츠는 자신의 영토가 넓어지고 감당해야 할 일들이 늘어나자 주님 도움이 필요함을 금방 알게 됐다. 그는 하느님의 '위대한 손길'에 의지해야 함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는 구체적 삶의 질곡에서 하느님께 도움의 손길을 청할 줄 알았다.

 넷째, "제가 환난을 벗어나게 해주세요"하고 기도했다. 시험당할 때 우리는 어떻게 기도하는가? 대부분의 경우 굴복하지 않도록 힘을 달라고 기도한다. 야베츠는 "환난 속에서 나를 지켜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지 않고 "환난을 벗어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다. 이는 예수님이 주님의 기도에서 가르쳐 주신 것과 같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루카 11,4).

 우리도 야베츠나 예수님과 똑같이 기도해야 한다. 유혹이나 환난을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유혹을 최대한 멀리함으로써 하느님의 일에 협력하는 우리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구르의 기도는 잠언 30장, '아구르의 잠언' 내용 중 일부이다. 아구르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자신은 다른 사람에 비해 지혜도 없고 슬기도 없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도 깨치지 못한 사람이라고 고백하지만 그야말로 진정 하느님께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었다.

 "저는 당신께 두 가지를 간청합니다. 제가 죽기 전에 그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허위와 거짓말을 제게서 멀리하여 주십시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 30,7-9).

 그가 하느님께 간청한 첫째는 '허위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죽기 전의 소원이라고 하기에는 좀 어이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인생의 굴곡을 경험한 후 지나온 날들을 생각해 볼 때, 정말 헛된 것에 매여 산 날이 얼마나 많았나를 깨달은 자의 기도임을 알 수 있다.

 둘째는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마시고, 먹고 살 만큼만 주십시오"라는 기도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넉넉하고 부유하게 살고 싶은 욕망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가난하게 하지 마시고, 부유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하지만 진정 무엇을 위해 부유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부유함으로 말미암아 저지를 죄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아구르의 기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 무엇보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청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가 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소유가 많아짐으로 인해 하느님을 외면하지 않게 되기를 청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부유함보다 하느님과 더불어 사는 부족함이 낫다는 간구였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많은 것을 가지려 하고 많은 것을 이루려 하고 많은 것을 누리려 한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늘 상기해야 한다. 하느님을 잃는 것은 곧 생명을 잃는 것이라는 사실을 늘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셨다.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태 16, 26)

평화신문 기자   pbc@pbc.co.kr
 

 

 

   

"그누구도 내 허락없이는 나를 불행하게 만들순 없어"

 

 

 

"어떤 이들은 '나대지 마라' '꼴 보기 싫다' '신부가 품격을 유지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도 자기 자신을 낮췄습니다. 대중속으로 들어가 세리(稅吏)와 창녀들과 어울렸습니다."

'무지개 원리'로 유명한 차동엽(51) 신부는 버릇처럼 고개를 약간 쳐들고 말했다. 그는 이날도 바빴다. 이미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중소기업인 대상 조찬 강연을 마친 뒤였다. 인터뷰가 끝나면 또 두 차례 강연이 예정돼 있다. 요즘 주부와 기업인들 사이에서 그는 '대중스타'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중이다.

아침 방송·기업체·군부대·관공서 등에서 다투어 모셔가, 그는 작년 한 해만 600회 이상을 강연했다. '기업체로 출근하는 신부'라는 말도 들었다. 또랑또랑한 입담으로 진행되는 그 강연 앞에서 청중들은 대부분 매료된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꿈을 품어라"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고 주문하는 그의 책 '무지개 원리'는 이미 100만부 가까이 팔렸다.

내가 "'무지개 원리'를 읽어보니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자기계발서인데 왜 사람들은 열광할까요?"라고 하니, 그는 "보는 눈이 있어야 보이는 것"이라고 답했다.

 

"저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행복과 성공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를 말합니다. 그냥 성공처세술이 아니라 뿌리가 있는 겁니다. 삶의 통찰과 깨달음이 있죠. 제 강의에서 기업을 하는 사람들은 희망을 얻어요. 이게 입 소문으로 퍼져 나간 겁니다. 제 행위가 신부답지 않다고 하는 이도 있는데, '나쁜 나무와 좋은 나무는 평가할 수 없다. 열매를 보면 안다'고 했어요. 좋은 열매가 맺혔으면 좋은 나무고 나쁜 열매가 맺혔으면 나쁜 나무입니다."

내 눈에는 안 보였지만, '지친' 대중들에게는 뭔가 보였던 게 사실이다. 주위 사람들은 그의 책과 강연을 화제로 삼았다. "모두가 힘들고 각박한 지금 사람들의 심성을 어루만져주고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어달라"며 그를 인터뷰해 달라는 요청도 있었다.

―신부님이 전하려는 메시지의 핵심은요?

"한마디로 하면 '그 누구도 내 허락 없이는 나를 불행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겁니다. 열쇠는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나라는 사람의 수용구조를 바꾸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거죠. 이는
소크라테스의 아타락시아(ataraxia: 평정한 마음)나 예수님의 말씀, 불교의 가르침과 통해요. 내가 망하는 상황에 처해도 스스로 만족할 마음만 있으면 끄떡없다는 거죠."

―마음에 달렸다는 것, 마음으로 모든 걸 설명해버리면 우리가 사는 현실이 외면됩니다.

"그렇지만 마음이 때로는 현실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현실이 부정적이라도 마음과 말을 긍정적으로 하면 현실이 긍정적이 돼요. 부정적 현실에서도 마음을 놓치지 말라는 것이죠."

―세상을 그처럼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게끔 타고난 사람도 있지 않을까요?

"출생하면서 본래 그럴 수도 있지만, 후천적으로 그렇게 야금야금 만들어지는 거죠. 기업인들에게 강연해보면, 이분들은 '안 된다'는 말은 절대 안 합니다. 안 되는 걸 자꾸 생각하면 기업을 못 하니까, 되는 쪽으로만 생각하는 데 훈련된 사람들이에요. 기업인들에게는 제가 '요만큼' 희망을 이야기하면 '이만큼' 더 크게 받아들여요. 긍정적으로 보는 것도 훈련으로 된다는 뜻입니다."

―헛된 희망, 너무 많은 기대를 품게 만드는 것은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을 막지 않을까요?

"희망을 걸 게 없는 현실이라서 절망만 할 건가요? 그러면 죽음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껍데기뿐인 희망이라도 가지라는 겁니다. 설령 그 껍데기뿐일지라도 희망의 역동성으로 그대를 일으켜 세워 줄 것이라고들 합니다. 전투에서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던 나폴레옹이 '나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다. 그것은 희망'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제 성장과정이 그랬으니까요. 어려서는 서울 철거민촌에서 쌀 배달, 연탄 배달을 했어요. 집안이 어려워 장학금을 주는 공고(工高)로 진학했습니다. 이럴 경우 기술 배우고 인생 끝이지요. 대학을 꿈꾸는 제게 '공고에서 어떻게 대학가나, 웃기지 마라'고들 했지요. 왜 못 가나, 저는 서울대 공대를 갔습니다. 그런 식으로 점철된 인생이었어요. 남들은 '안 된다'고 하는 데서 저는 '되는' 삶을 살았어요."

―그건 신부님이 좋은 유전자를 타고나서 그런 것이지요.

"사실 왜 제게도 절망이 없었겠어요. 10년 전쯤, 낮에는 본당 업무 밤에는 논문 번역으로 과로해 간경화에 걸렸습니다. 요양을 위해 일년 반 동안
지리산에 들어가 생활했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잘못하면 끝'이라는 절망이 때로 들곤 했지요. 결국엔 '난 여기서 나간다'는 희망이 이긴 겁니다. 만약 마음을 먼저 잃었다면 지금 저는 이렇게 움직일 수 없었겠지요. 맑은 공기에 식이요법으로만 설명될 수 없습니다. 똑같은 조건에서 죽는 경우도 많거든요."

―신부님은 '팔자(八字)는 없다. 팔자는 내가 만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뛰어넘을 수 없는 운명적 한계가 있음을 인식해야 우리 삶이 겸허해지지 않을까요?

"삶에서의 겸손을 가져다 준다는 점에서 한계 인식은 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그 한계를 넘을 수 있는 가능성이 내 안에는 있다는 거죠. 쉽게 포기하지 말라는 겁니다. 제가 '팔자가 없다'고 한 것은 드골 대통령의 말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는 '역사는 운명론을 가르치지 않는다'며 전후(戰後) 프랑스를 재건했습니다."

그는 서울대 공대 졸업과 병역을 마친 뒤 다시 신학대에 들어갔다. 그때 나이가 스물여덟이었다.

―왜 뒤늦게 사제의 길로 갔나요?

"우리는 '모래시계 세대'(정치·사회적 격변기였던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까지 대학을 다닌 세대)입니다. 당시 주위의 많은 학생이 진지한 고민을 했어요. 저도 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과 명동성당을 바라보면서, 성경공부 하러 다니곤 했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의 강의도 들었고 당시 재야운동의 교과서였던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책에도 심취했어요.

그런 시대적 환경에서 그쪽을 동경하다가 성직자 길을 택한 것 같은데…. 어쩌면 젊음의 혈기로 밀고 간 측면이 있지요. 나중에 세월이 지나고 나서 '아, 그때 홀린 거 아니야'라고 했지요."

―사제라면 기도와 고독, 사색하는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신부님은 마치 거리에서 약을 파는 약장수처럼 비치기도 합니다.

"신부는 가장 안정적인 직업입니다. 가족이 없으니 돈에 대해 연연해 할 필요도 없어요. 소위 '약'을 팔 이유가 없어요. 제가 전공한 것이 '사목(司牧) 신학'입니다.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기쁨과 희망, 슬픔과 은혜, 현대인의 그것은 교회의 그것이어야 한다'는 사목 헌장이 채택됐습니다. 교회가 세상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거죠. '난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는다/ 난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이다/ 난 한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다…'라는
마더 테레사 수녀의 시도 좋아합니다. 물론 모든 성직자가 저처럼 이래야 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원래 언변이 좋았습니까?

"대학 시절에는 논리적인 학술 토론을 잘했던 편이었습니다. 소위 '만담', '구라' 식으로 된 것은 저 자신을 대중화하는 과정에서 형성됐어요. 처음 강연할 때 조는 사람들이 많아, 이래서는 안 되겠다며 적응한 거죠."

―한 해 600회면 하루에 평균 두 번 같은 내용의 강연을 하는 셈인데, 질리지 않습니까?

"내가 하는 말이 진리라면, 일상의 밥을 먹듯이 물리지 않는 법입니다. 맛있는 음식만 탐하는 미식가라면 물릴 거예요. 거절을 못 해 응하는 강연도 많아요."

―열성팬들이 많을 것이고 혹시 젊은 여성들의 유혹은 없나요?

"여성으로부터 유혹을 많이 받죠. '신부님 사랑합니다'라고 하지만, 바빠서 뭐, 하루 종일 사생활이 없어요. 혹 심심하면 생각해보겠지요(웃음). 사실 일반 서민들이 제게 쪽지를 전해주고 인생 상담 편지를 많이 보냅니다. 누가 제 이름을 팔아 무슨 짓을 했는지 어떨 때는 고발장의 내용증명도 옵니다."

―사람 사는 데 무엇을 가장 귀중한 가치로 둡니까?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목(司牧)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지요. 가령 교회법으로는 이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안 되는 이혼을 신자가 했다면, 제 선택은 이혼한 사람을 도와주고 잘 살도록 격려해주지 심판하는 쪽이 아닙니다. 원칙은 원칙이지만 또 살아야 하잖아요."

 
                          <자료출처 : 조선일보(대담 : 최보식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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