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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셉 수사님의 성소이야기]나를 이끄신 하느님 7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4-04 조회수704 추천수10 반대(0) 신고
 

[요셉 수사님의 성소이야기]나를 이끄신 하느님 7

                    

   내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낄 그 당시, 이미 위의 큰 누님과 형님은 출가하고 독립하여 각자의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었고, 나는 작은 누나와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 우리 집의 생활비는 안정된 직장을 다니고 있던 작은 누나가 부담하고 있었고, 몇 년 전에 캐나다로 이민을 간 형님으로부터는 점점 소식이 뜸해지고 있었습니다.


   형님의 편지에는 어머니를 그곳으로 모시고 싶다는 원의가 있었지만, 어머니는 그리로 가시는 것을 별로 마음 내켜하시지 않았습니다. 


   나보다 세 살 많은 작은 누나는 그동안 성소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가, 내가 가르멜에 들어갈 뜻을 품고 적극적으로 준비를 하던 그 무렵부터는 누나도 성소에 관심을 가지고 여기 저기 알아보기 시작하였습니다.


   내가 소록도에서 봉사하던 그해 여름, 누나도 친구들과 함께 남해안의 모처로 여름휴가를 떠나고, 어머니는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어머니의 건강이 갑자기 나빠졌는데도 그냥 꾹 참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둘 다 집에 와서도 별로 어머니는 내색을 하지 않고 지내다가 며칠 후, 복통을 호소하셔서 부랴부랴 큰 병원으로 가서 진단을 하였는데, 그 결과 말기 위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담당의사가 우리를 따로 불러 “잘 해야 6개월 사실 수 있다.”고 하였을 때, 누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며 눈물을 삼켰고, 나도 하늘이 무너지는 걸 느꼈지만, 어머니한테 내색하지 않기 위해 정신을 수습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날부터 어머니를 위한 우리 모두의 투병생활에 들어갔습니다. 이미 현대 의료 기술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어서 우리는 갖가지 민간요법, 식이 요법, 그 방면에 유병하다는 돌팔이 의사의 처방에 따른 치료방법에 큰 기대를 걸면서까지 어떻게 해서라도 어머니를 살리려고 애썼습니다. 누나는 어머니의 병구완을 위해 당장 직장을 그만 두었지만, 나는 그런다고 하여 별 도움도 되지 못해, 몇 달 남지 않은 학교생활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수도원 측에서는 내가 입회하면 사제 지망을 하기를 원한다면서 신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당시에는 대학 입학을 위한 예비고시를 통과해야 하였는데, 내가 7년 전에 졸업한 공고에서는 그것을 대비한 공부가 전혀 없었고, 특히 나에게는 영어, 수학 등의 기본 학력이 부족했습니다.


   그렇다고 대입 학원에 다닐 수도 없는 상태에서, 교리 신학원에서의 공부를 계속하면서, 혼자 따로  시험 준비를 한다고 하여 시험을 보았지만, 결과는 예상대로 실패였습니다. 이런 결과에 대해 나 자신보다도 수도원 측에서 더 실망하는 눈치였습니다. 나로서는 사제직보다는 수도생활 그 자체에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평수사로라도 입회할 희망을 갖고 있었지만, 수도회 측에서는 내가 몸이 약해 보인다면서 내 생각을 회의적으로 보는 듯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12월 중순에 2년 과정의 교리 신학원 졸업을 하고, 그 후에 나는 시간이 있는 대로 삼선교에 있는 수도원으로 가서 며칠간  이삿짐을 싸는 것을 도와드렸습니다. 짐을 싸면서 몇 벌의 수도복을 챙기면서 내가 그것을 얼마나 입어보고 싶어 하였는지 지금까지도 그때의 열망과 감정이 생생합니다.


   드디어 인천 수도원의 건축이 완성되어 1996년 성탄 직전인 23일에 새 수도원 건물에 입주를 하였는데, 몇 대의 대형 트럭 대열의 맨 앞차에 내가 탑승하여 다른 차들을 인도했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수도원의 모든 수사님들과 친숙해져서 그 후에는 더욱 자주 수도원을 방문하여 수사님들과 함께 일하고 기도하고 휴식하면서 며칠을 보내다 오곤 하였습니다.


   특히 무슨 큰 축일이 되면 의례히 내가 수도원을 방문할 줄 알고 몇몇 수사님들이 나를 기다리는 듯 했습니다. 이미 그 당시 수도원에서는 네 분의 창립자들 외에 새로이 청원자들을 받아들여 수도가족이 8~9 명이나 될 때였습니다.


   새해가 되면서 어머니의 병세는 점점 더 나빠졌고, 집안 경제사정도 조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취직을 하려고 교회안팎 여기저기를 알아보기도 하였지만, 쉽게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아무런 희망이 없어보이던 그 시절, 어머니를 위해 약수를 받으러 북한산 계곡을 사흘이 멀다 하고 오르내리면서 눈 아래로 보이던 서울 가르멜 수녀원을 내려다보며, 얼마나 간절히 열망하며 그 <평화의 집>을 그리워했는지 모릅니다.


   작은 누나의 눈물겨운 간호도 아랑곳없이, 부활축일을 열흘 앞두고 어머니는 우리 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하루 종일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우리가 뿌린 성수로 어머니의 옷이 촉촉이 젖을 정도로 선종을 비는 기도를 우리 남매는 간절히 정성스레 바쳤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한 달 전에 누나의 성소는 완전히 결정이 되어, 어느 수녀회로부터 언제라도 입회할 허락을 받았는데, 아직 어머니의 정신이 온전할 때 우리는 둘 다 성소의 허락과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제 누나는 당장이라도 수녀원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아직 나의 성소가 완전히 결정되지 않아 그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수도원 측에서는 아직도 나의 성소에 대해서 회의적이어서 내가 입회할 허락을 받기 위해 수도원을 방문할 때마다 실망만 안고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 무렵 나의 친구 수사들이 있는 모 활동 수도회에서는 적극적으로 나를 이끌었지만, 내가 입회하기를 원하는 가르멜 수도회에서는 언제 허락이 떨어질지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나는 그때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지금 가르멜 수도회를 포기하고 저 수도회로 들어간다면, 거기서 살다가 반드시 후회할 날이 올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가르멜 수도회에서 확실하고 결정적인 반대가 없는 한 끝까지 기다려 볼 작정을 했습니다.


   5월 초순, 수도원의 축성식에 참석하기 위해 내가 가르멜을 방문하여 며칠 지내다가 돌아올 때, 수도회 측에서는 내가 진정으로 평수사 생활이라도 하기를 원한다면, 내가 수도원에서 요긴하게 쓰일 어떤 기술을 배워서 들어오라고 조건을 붙였습니다. 수도원에서는 내가 재봉 기술을 배우기를 원하여, 나는 며칠 후 서울의 청계천 6가에 있는 <라사라 양재학원>에 등록하여, 재단 기술 3개월 과정과 재봉 기술 3개월 과정을 모두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집에서는 수녀원 입회 준비를 하는 누나를 도와주기 위해 우리가 정한 시간표에 따라 성무일도를 하고, 또 내가 교리 신학원에서 배운 지식을 일부라도 전해 주기 위해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면서 본당에서는 성당 건물을 빌려, 내가 알고 있는 몇몇 형제자매들과 함께 <성소모임>을 구성하여 매월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는데, 여기에는 본당 경계를 넘어 다른 본당, 다른 교구에서도 많은 형제자매들이 참석을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도한 그 모임에는 수도 성소를 생각하는 형제자매들이나 교구 사제 성소를 지망하는 형제들에 이르기까지 성소에 관심 있는 이들이 많이 참석하였는데, 어떤 때는 60 명 이상 모이기도 하였습니다.


   모임에 주축이 되었던 우리는 각자가 한 분야에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의견을 나누었는데, 예를 들면 한 형제는 교구 사제 성소를 맡았고, 한 자매는 결혼 성소에 대해서 맡았고, 나는 수도 성소에 대해서 맡았는데, 이 모임에 참석하는 모든 이들은 이 세 가지 성소에 대해서 골고루 다 듣도록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모임을 이끌고 우리는 몇 개의 수도원과 수녀원을 방문하였고, 2박 3일의 피정을 함께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에는 아직 교구 차원이나 수도회 차원의 개별 성소자 모임이 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사이에 내가 배우던 양재학원 6개월 과정이 끝나갈 무렵에 수도원을 방문하여, 드디어 입회할 허락을 받았는데, 입회일은 11월 2일 즉 <위령의 날> 로 정해졌습니다.


   나의 입회일자가 확정되자 누나도 입회 날짜가 정해졌는데, 나보다 닷새 빠른 10월 28일로 정해졌습니다. 우리는 며칠 동안 둘이서 함께 남대문 시장과 동대문 시장을 두루 다니면서 각자가 지참할 물품을 구입하였는데, 그 시절 어느 구두 방에서 나눈 대화가 아직까지 생생합니다.


   “우리는 아주 먼 데로 가니까 무엇보다도 튼튼한 구두를 원한다.”고 하니까, 구두 방 주인은 “어디 미국이라도 가느냐?” 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미국보다도 더 먼 데, 한 번 가면 다시 못 올 데로 간다.”고 하니까, 그 사람이 이상한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았는데, 그 당시 우리의 심정이 그토록 비장하고 절박 했던가 봅니다.


   입회를 앞두고 우리는 가까운 친척들을 방문했는데, 우리 둘 다 세상을 떠나 수도원으로 간다는 말에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애석해 하였고, 어떤 이들은 몇 시간 내내 간곡한 설득을 하며 우리의 결심을 만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가산을 완전히 정리하여, 나머지는 큰 누님한테 넘기고 예정했던 대로 입회를 하였는데, 나는 먼저 입회하는 누나와 함께 수녀원에 갔다가 5일 후에 수도원에 입회하였는데, 그때는 본당의 수녀님과 사목회원들이 동행하였습니다.


   나의 성소 이야기를 계속 진행하기 위해서, 여기서 잠깐 방향을 바꾸어 나의 집안 사정 이야기를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둘러싼 주위의 모든 사정과 그 당시의 상황 안에서 나의 성소가 굳어지고 결정되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나는 2남 2녀의 형제자매 중에서 막내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6.25 동란 중에 돌아가셨고, 어머니 혼자서 온갖 고생을 다하시며 우리 4남매를 키워내셨습니다.

 

   1977년 11월 2일, 그날은 하늘이 유리알처럼 맑은 날이었습니다. 그날은 교회에서 정한 <위령의 날> 이었기에 각 사제는 그날 하루 동안 3대의 미사를 드리는 날이어서, 수도원의 한 신부님은 그 3대의 미사 중에 한 대를 나를 위해서 바치기를 원하셔서, 내가 입회하자마자 짐도 풀기 전에 하느님께 나를 봉헌하는 미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 날 입회할 수 있었던 것은 나를 위한 연옥 영혼들의 기도 덕분이라 생각하여, 나는 그분들을 내 성소의 은인으로 모시고 그들을 위하여 정성껏 기도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입회한 첫날밤, 드디어 하느님의 집에서 살게 된 은총에 감사드리며, 침묵과 고독이 충만한 나의 수방에서 길이길이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도와 달라고 진정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다음 기회가 된다면 하기로 하고, 내 수도생활의 간단한 약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1978년 9월 30일- 청원착복


   1979년 1월8일  - 착복, 수련기 시작


   1980년 2월23일 - 첫 서원


   1985년 4월14일 - 장엄 종신서원


 

                        

                         <1980년 2월 23일 첫 서원예식 장면>


   이상이 내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수도원까지 오게 된 나의 성소의 이야기입니다. 나는 누구보다도 어렵게 성소를 얻었다고 생각하여 내 성소의 소중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수도생활 중에 어려움을 겪을 때 마다 내가 어렵게 얻은 성소의 소중함을 되새기며 참아 견디려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글을 읽는 수사님들은 지금 나처럼 엉터리로 사는 수사가 정말 저런 열정을 가지고 있었을까 하고 잘 믿어지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때는 정말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니 나를 위해서, 내가 수도생활을 잘 하여 성소의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기도 좀 해주십시오. 남을 위해서 진정으로 기도하면 하느님께서는 그 기도하는 이를 위해 갑절로 은총을 주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리고 지금 성소를 찾고 있는 독자들을 위해서는 성경구절 한 마디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지금까지 저의 부족한 글을 읽어 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가끔 저를 위해, 기도 좀 해 주시라고 부탁드리면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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