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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희생양 그리스도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09-04-05 조회수812 추천수11 반대(0) 신고

 

 

 

성지주일 - 희생양 그리스도

 

우리는 영화나 책을 통해 로마 네로 황제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네로 황제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한 장본인이 되었지만 집권 초기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집권 초기에는 경기장에서 살육하는 시합을 금지시켰고 세금을 내렸으며 사형을 금하고 주인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은 노예들이 민사소송을 제기할 수 있게 하고 자신에 대해 음모를 꾸민 사람들까지도 사면해 주었습니다. 잔인한 검투경기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시, 연극, 운동경기로 돌리게 한 개혁적인 황제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정치보다는 무절제한 취미와 향락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나중엔 자신의 아내까지 살해하게 되고 스스로 연극배우와 음악공연을 하는 등 이상행동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로마에 큰 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 그가 비록 로마에 있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가 로마의 건물들을 그리스 식으로 새로 짓기 위해서 일부러 재개발지역에 불을 낸 것이라고 추정하였습니다.

네로는 이 화재의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리게 합니다. 즉, 불이 발생할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화재 현장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는 말을 퍼뜨린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써놓고 다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런 식으로 백성들의 원성을 누그러뜨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당시 로마법은 남에게 가하려고 한 대로 자신도 똑 같은 벌을 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불로 사람을 죽이려했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그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화형을 시켰습니다.

또 이것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방법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는데 시민들은 네로황제에 대한 분노를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죽이면서 풀었습니다. 네로 황제는 이렇게 자신의 잘못을 죄 없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워 그들의 희생을 통해 로마인들과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죽음을 부른 분노에 대한 합당한 대가는 다른 사람들의 죽음으로서만이 그 화를 가라앉힐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가장 희생양으로 좋았던 것이 힘없던 그리스도인들이었던 것입니다.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어쨌거나 희생양이 필요한 것입니다. 화가 나면 무엇이든 막 부수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 화를 다른 것을 통해서 풀고 싶은 것입니다.

어렸을 때 저희 집에 개 한 마리를 키웠습니다. 저는 부모님께 혼나거나 학교에서 안 좋은 일이 있으면 그 개를 막대기로 때렸습니다. 그 개가 미워서 때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화풀이로 때린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때려도 대들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그 개가 대들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못 때렸을 것입니다. 아무 죄도 없는 개를 희생양으로 삼는 것은 미안하지만 그래도 나름 화가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개를 때린다고 억울하게 당한 심정이 다 풀리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위해 온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당신이 만든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마련해두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은혜에 보답을 하기는커녕 하느님과 똑같아지려는 욕망으로 죄를 짓게 됩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더 이상 하느님과 온전한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부끄럽고 두려워서 하느님을 피합니다. 그리고 나무 뒤로 몸을 숨깁니다.

사람은 나름대로 희생양을 만들어서 양심의 가책을 없애보려 합니다. 그래서 아담이 하와 때문에 그랬다고 하고 하와는 뱀 때문에 그랬다고 서로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양심이 편안해질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 탓을 하는 것도 자신들의 죄를 대신해서 동물을 잡아 바치는 희생 제사도 양심의 죄책감을 완전히 사리지게하지는 못했습니다. 사람의 죗값은 사람이 치러야 온전한 것이지 동물을 대신 죽인다고 자신의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셨고 바오로사도도 죄의 삯은 죽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보상할 합당한 희생은 바로 사람이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떤 희생도 양심의 가책을 깨끗이 없애거나 하느님의 분노를 완전하게 끄지는 못할 것입니다.

죄는 죽음이지만 피는 생명입니다. 누군가 세상의 죄를 위해 피를 흘려야하는데 세상엔 누구도 남의 죄까지 짊어지고 피를 흘릴 만큼 완전한 희생양은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과의 온전한 관계를 위해 네로 황제처럼 아무나 잡아 희생시키시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당신을 분노케 한 세상의 죄를 짊어질 희생양이 있어야하는데 하느님은 또한 사랑이시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강요하실 수 없으십니다. 오직 성자께서 “주님의 뜻을 이루려 제가 가겠습니다.”라고 당신 자유로 희생양이 되실 것을 받아들이십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희생으로 네로 황제와 백성들 간에 평화가 왔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죄로 인해 갈라졌던 하느님과 인간에게 다시 평화가 온 것입니다. 마치 잘게 부수어진 시멘트가 갈라진 벽의 틈을 메우듯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하느님과 인간이 화해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이 양심의 평화를 주시기 위해 희생양으로 오셨습니다. 모든 죄의식으로부터의 해방이 관계를 정상화시켜줍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손수 희생양이 되셔서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에 대한 분노와 우리 자신이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을 잊게 만드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많은 사람의 환호 가운데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예수님은 죄의식의 해방자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모든 백성은 그 분의 오심을 기뻐합니다. 그 이유는 그 분이 다시 행복을 되찾아 주실 분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며칠 뒤에 모든 백성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릅니다. 그 분이 오실 때 그렇게 기뻐하던 백성이 이젠 그 분을 고통스럽게 죽이려고 목청을 높여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소리 지릅니다.

그 백성들 가운데 나도 끼어 있습니까? 만약 그 백성 가운데 내가 끼어있지 않다면 아직 그 분은 나의 희생양이 아니고 나의 구원자가 아닙니다.

그 분을 때린 것이 바로 나이고 그 분에게 침을 뱉고 오물을 던진 것이 바로 나이고 그 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고통을 드린 것도 바로 나라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내 양심이 자유로워집니다. 실제로 그 분은 다른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고 바로 나의 죄 때문에 대신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저희 집은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하였습니다. 학교에서 채변봉투에 변을 담아오라고 해서 화장실에서 일을 보던 중 채변봉투가 그만 변기 구멍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저의 짧은 팔로는 그 채변봉투를 다시 집어 올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아버지를 불렀습니다. 아버지도 거의 변기에 엎드리다시피 하여 간신히 채변봉투를 건져 올리셨습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지만 아버지가 대신 희생하시고 다시 원래상태로 돌려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잘못으로 더러운 곳으로 추락한 우리들을 대신해서 손수 더러운 곳에 내려오시어 더러운 냄새를 맡으며 우리를 다시 건져 올려주신 것입니다. 그 희생 덕으로 우리는 다시 아버지와의 온전한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이번 주는 성주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한 희생양으로 십자가에 달리시는 주간입니다. 이 한 주간 동안 가져야 하는 마음은 아주 단순합니다. 그 분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바로 ‘나’라는 것과 따라서 그 분을 더 ‘사랑’해야겠다는 결심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평화를 위한 작은 희생양이 되려는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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