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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죽음을 이긴 향기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9-04-06 조회수517 추천수8 반대(0) 신고

 

죽음을 이긴 향기 - 윤경재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다.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끼여 있었다.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많은 유다인들의 무리가 몰려왔다. 예수님 때문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도 보려는 것이었다. (요한 12,1-9)

 

 이 잔치가 베풀어진 날이 파스카 축제 엿새 전이었으므로 역산하면 일요일이 됩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시기 일주일 전 일요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요한저자는 숫자의 상징을 즐겨 사용하였습니다. 그날은 아직 완전한 주일은 아니었습니다. 예비 주일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 라자로가 죽음에서 일으켜진 날이었습니다. 죽은 라자로에서 나는 썩는 악취가 아니라 순수한 나르드 향이 온 방안을 가득히 채우는 은총의 날이었습니다.

  그날 모인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과 죽음을 이기신 권능을 찬미하러 모인 사람들과 인간적인 계산과 호기심에 머물러 진리를 통찰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 두 부류 사이에 벌어진 가장 큰 차이는 사랑의 값어치를 얼마나 크게 보느냐 입니다. 또 시선이 어디를 향하였는지가 서로 달랐습니다.

  진정 사랑을 아는 사람은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바쳐 사랑을 얻으려고 합니다. 이 세상 무엇으로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사랑이라 여깁니다. 물질을 뛰어 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인생의 모든 현상을 사랑의 눈으로 볼 능력이 없었습니다. 인생을 교환가치로 측정하였습니다. 교환가치에는 언제나 자기의 필요가 끼어들게 됩니다. 비교와 따짐이 따르게 되고 너와 나를 가르는 분별이 싹트게 됩니다. 삼백 데나리온은 300 명이 일해서 300 가정을 부양할 수 있는 돈이며 5000 명이 배불리 먹고도 남을 빵을 살 수 있는 돈보다도 큰 금액입니다. 그것을 어떤 결과도 얻지 못하고 한 몫에 털어 낭비하였으니 한심하였습니다.

  어쩌면 그는 이렇게 외쳤는지도 모릅니다. “가난을 외친 자가 누구였든가! 바로 예수 자신이 아니었나! 그런데 어찌 남에겐 가난을 강요하면서 자신은 그 비싼 향유로 온 몸을 적셔도 괜찮단 말인가! 오히려 나를 꾸짖다니! 이럴 수가 있는가?” 그는 이미 자기의 생각 속에서 예수와 다른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는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였습니다. 사랑을 위한 가난이 아니라 가난을 위한 가난에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명예를 위한 가난과 자신의 이익을 위한 가난에 빠졌습니다. 그는 회계를 담당하면서 돈을 아껴 집행을 했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라는 예수님의 지시를 직접 베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공생활 내내 늘 쪼들리며 살았을 것입니다. 돈의 위력 누구보다 비중 있게 받아들였으며 ‘돈이 생색을 낸다.’는 나름대로 가치관을 형성하였을 겁니다. 자금담당을 하느냐 제자들 사이에서도 그는 어느 정도 말발을 세우며 으스대었습니다. 제자들에게 돈으로 생색을 내었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그 자금을 개인적으로 유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인색한 성품을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예수께 제자로 부름 받은 이유를 잊고 말았습니다. 진정한 가난, 참 행복을 주는 가난, 자유를 주는 가난을 그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구경꾼으로 모인 유대인들도 시선이 라자로로 향했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그의 모습이 궁금했습니다. 그를 살려낸 예수라는 사람에게 눈길이 가기는 했으나 여전히 예수를 믿고 따르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벌어질 사태추이에 더 관심이 쏠렸습니다. 의회 지도자들과 바리사이의 반응이 궁금했습니다. 한바탕 몰아칠 폭풍의 전야 같은 위기감을 직감적으로 느꼈습니다. 결론이 어떻게 날지 모르겠지만, 되도록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아무 탈 없이 끝나기를 바랐습니다. 그들도 그 비싼 나르드 옥합을 깨어 예수님 발에 바르는 마리아의 과도한 태도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습니다. 온 집안을 가득 채운 향기가 어리둥절하기만 했습니다. 지나친 낭비라고 수근 대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이들은 사랑을 자기 그릇만큼만 받아들인 것입니다. 종지 그릇 크기만 한 사람, 대접만 한 사람, 함지박만 한 사람, 자신의 전부를 내어줄 만한 사람 등이 모였습니다. 자기가 받은 은총을 크게 생각하는 사람만이 큰 사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아무리 큰 은총을 받았더라도 그 은총을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사랑마저도 적게 베풀 것입니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루카 7,47)

  지금도 우리는 마리아가 깬 나르드 향기를 맡으며 미사와 전례에 참여합니다. 이천 년 동안 이 세상 곳곳에서 풍겨나는 그 향기는 자신이 받은 용서와 은총을 향기롭게 여기는 사람들 코끝에서 영원히 맴돌 것입니다. 그 향기를 체험해 보지 않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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