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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간의 선택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9-04-07 조회수801 추천수12 반대(0) 신고
 
 

인간의 선택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 윤경재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요한 13,21-38)

 

 성 주간에 우리는 유다와 베드로의 배반에 대해 기록한 복음서를 읽습니다. 특히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긴 대목은 언제나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우리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얼른 삼키지도 못하겠고 뱉어내기에도 만만치 않아 오랫동안 우리를 괴롭힙니다. 아주 많은 사람이 이 대목에 이르러 궁금증과 의심을 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확실한 묵상이 부족하여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 대목을 인간으로서 완전한 이해를 할 수 없는 신비라는 것을 먼저 인정하여야 합니다. 오직 모를 뿐이라는 고백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의 자세일 것입니다. 하지만 오직 모를 뿐이라는 고백에도 차원이 분명히 있습니다.

  처음부터 알 수 없는 신비라고 제쳐둘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까지는 인간적 묵상을 통해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노력을 계속해야합니다. 그것이 신비에 올바로 접근하는 태도일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 하는 질문을 통해서 주님께 다가가려는 노력이 바로 신앙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왜?’라는 질문이야말로 인간의 몫입니다. 주님을 만나려는 원의가 이 ‘왜?’에서 출발한다는 진리를 우리는 욥기를 통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이 말씀이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듭니다. 마치 유다의 배반을 기정사실처럼 인정하시고 그 배반이 예수님께서 수난의 길을 걸어가시는 필요조건인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인간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실 때부터 선택의 자유를 지니고 태어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첫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을 수 있는 선택의 자유를 허락하시고 못 따먹게 강제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을 믿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의 속뜻은 인간의 선택에 대해 무한책임을 지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심정을 예수님께서도 그대로 지니셨습니다. 요한 저자는 이 마음을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13,1)라고 표현합니다. 당신의 사람이라 함은 인간 모두를 뜻합니다. 당신 사랑의 대상은 누구를 구분하실 수 없습니다. 그것이 그분의 본질입니다. 그것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끝까지라는 말은 누구도 빼놓지 않고 종말에 이르기까지 온전히 사랑하셨다는 말씀입니다. 99마리 양을 두고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목자의 모습입니다. 무한책임을 지시는 아빠 하느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이신 빵을 떼어 유다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행위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눈이 즉시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요한복음 21장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빵과 고기를 나누어 주시자 일곱 제자들은 예수님을 아무 의심 없이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눈이 열리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주님께 사랑을 받고 있으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님의 도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네가 하려는 일’은 결국 선택의 행위입니다. 사랑의 빵을 받고 눈을 열 것인지 눈 감을 것인지 선택하는 행동입니다. 그 선택을 신속하게 아무 의심 없이 결단하라는 촉구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예수님의 몸이요 사랑인 그 빵을 받아먹었지만, 그 사랑을 사탄에게 팔아넘겼습니다. 여기서 복음서저자는 단어 선택을 기묘하게 합니다. 배반의 행위를 ‘팔아넘김’으로 본 것입니다. 그리스어 ‘배반하다’에 두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프로디도미와 파라디도미입니다. 요한저자는 파라디도미를 썼습니다. 파라디도미는 책임을 여기서 저기로 전가하는 뉘앙스가 담겼습니다. 그래서 우리말로는 팔아넘김으로 번역합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사랑에 눈을 감았을 뿐만 아니라 그 책임을 악마에게 전가해버린 것입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결정하지 않고 악마에게 미루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악마는 그 일을 자기 나름대로 자기에게 유리하게 사용하였습니다.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인간이 해야 합니다. 악마에게 책임을 전가할 때 일이 어긋나게 되는 법입니다. 악마는 사랑을 할 수 없었기에 악마가 된 허상입니다. 인간이 사랑하게 되면 생겨날 수 없기에 실상이 아니라 허상이라는 말입니다. 죄를 지음으로써 만든 허상일 뿐입니다. 반드시 있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유다를 믿으셨습니다. 회개하리라 기대하셨습니다. 이렇게 보는 타당한 이유는 베드로의 배반을 용서하시는 대목에서 증명됩니다. 베드로로 대표되는 제자는 누구나 예수님을 배반할 어리석음에 빠질 수 있었습니다. 비단 베드로라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나약함을 이미 꿰뚫고 보셨기에 그렇게 예견하신 것입니다.

  유다와 베드로 모두에게 여전히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받아들였으나 유다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두 제자가 보인 행동의 차이는 생명과 죽음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거절하느냐의 차이는 건널 수 없는 심연입니다. 끝까지 기회를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우리는 언제나 신뢰하여야 하겠습니다. 사랑을 받은 자는 사랑을 회피할 것이 아니라 사랑을 전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읽을 수 있어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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