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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124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4-08 조회수516 추천수2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성주간 수요일]

<사람의 아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6,14-25

14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15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16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17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아무개를 찾아가, ‘선생님께서`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 하십니다.’ 하여라.” 19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20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 21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2 그러자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4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25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유월절인 파스카와 무교절은 유대민족들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에 야훼의 도움으로 모세가 행한 열 가지 재앙 중에서 마지막 재앙에서 유래되고 있으므로 유대민족의 해방과 관련된 축제입니다. 

무교절을 한자로는 無酵節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불민한 탓에 '酵(효)'를 '교'로 읽는 경우는 아직까지 접해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누룩이 없는 빵을 먹는 기간이라는 의미이므로 무효절이 옳은 번역으로 여겨지지만 무교절로 번역한 이유는 의문입니다. 우리 어감으로는 '무효'는 별 유쾌한 뜻이 아니며 특히 종교적 행사를 무효라고 발음하는 것은 난처하기 때문에 부득이 무교절로 표기한 것으로 추측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듯 민족의 고유 미풍양속은 기꺼이 동참하고 계십니다.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민족의 미풍양속도 구분하지 못하고 우상숭배라는 해괴한 논리로 이를 거부하고 심지어는 단군상마저도 훼손시키는 이런 몰지각한 행위들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데 있으며 성경에 기록되어있다 하여 유대민족으로 착각하여 그들의 율법을 준수하는 그런 신앙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도성 안으로 들어가 '아무개를 찾아가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음식을 차려라고 분부하셨습니다. 파스카 음식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음식을 차려라고 하십니다. 과연 그 어느 누구가 예수님처럼 죽음 앞에서 이렇게 초연할 수 있을까? 죽음을 초월한다는 것은 영성수련을 통해서 가능하겠지만 그에 앞서 현실세계를 완전 초월해야만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물 수 있을 것입니다. 현실세계에 속해 있으면서 현실세계를 극복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또는 육신은 쓸모가 없는 것일까?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은 현상계에 너무 연연하지 말라는 그런 뜻으로 묵상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저는 마르코복음서가 가장 정직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으며 가장 후대에 쓰여진 요한복음서와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르코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마지막 하신 말씀은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입니다. 이 마지막 말씀은 복음서 전체를 통해서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가장 정직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스스로 실패를 인정하는 이런 모습은 시간이 지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종교로 발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해결책은 당시 유대교와 조로아스터교, 미트라교 등 여러 종교에서 믿고 있었던 부활로 극적인 반전을 할 수밖에는 다른 방법은 없어 보입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부활하셨는지 그 여부와 관계없이 잘못된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으로 부활하는 의미에서도 부활은 우리 신앙에서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입니다. 그동안 너무 견고하게 육신의 부활을 고집해 왔기에 이제는 그 해결책을 찾아야 우리 그리스도교도 새롭게 부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유다와 같은 이런 짓들을 하지 말라는 교훈으로 묵상하고 있지만 저는 이 말씀은 무척 혼란스럽습니다. 종교는 이런 사람들을 교화시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성인군자만 있다면 종교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이 말씀에서 갑자기 히틀러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학살 사건이 떠오르고 있습니다. 히틀러는 유대인들은 태어나지 않았어야 할 인종이라는 생각으로 그 만행을 자행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아흔 아홉마리의 양보다 길잃은 한마리의 양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노력으로 유다는 회개하고 자결하여(마태 27, 5) 하느님의 나라에 갔을 것입니다. 유다의 죽음에 대하여는 사도행전은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행전 1,18) 우리 모두는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태어났으므로 출생을 가지고 논하는 것은 비 그리스도교적 발상입니다. 복음서에는 기자의 생각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기록된 경우도 있으므로 우리는 이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유다가 예수님에게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한 물음에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어법과 다른 어법이므로 시인하는 말씀인지, 아니면 부인하는 말씀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유다가 배반자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기 때문에 '네가 바로 배반자'다고 미리 속단하여 Yes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런 어법은 빌라도의 심문과정에서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묻자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루카 23,3)하시며 동일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서는 부인하는 뜻이므로 No의 의미가 있습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하신 말씀의 의미는 Yes와 No의 이런 단답형의 답변이 아니라 유다에게 한 말씀은 네가 네 입으로 아니라고 말하고 있으므로 행동도 그렇게 하라는 언행일치를 말씀하고 계시며, 빌라도에게 하신 말씀은 '유다의 왕'이 아니라는 것을 네가 알면서 굳이 물어볼 필요가 있느냐는 뜻이므로 쓸데없는 말은, 마음에도 없는 빈 말은 하지 말라는 뜻이므로 실언과 허언을 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어느 종교나 가릴 것 없이 지금 지탄을 받고 있는 것은 언행일치가 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깊은 영성은 감히 넘볼 수 없지만 언행일치의 삶만이라도 실천할 것을 새롭게 하며 오늘 묵상을 마칩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 이렇게 초연하셨습니다.
모든 집착을 버리면 그 어떤 경계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이치를 깨달아 참다운 신앙인으로 부활할 수 있도록
그리고 언행일치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언제나 성령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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