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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님인가 스승님인가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9-04-08 조회수556 추천수5 반대(0) 신고
 
 

 

주님인가 스승님인가 - 윤경재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 (마태 26,20-25)

 

 예수님께서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라는 폭탄선언을 하시자 제자들은 깜짝 놀라기보다 저마다 근심하였습니다. 보통은 자기는 아니라고 부정하며 펄쩍 뛰었을 것 같은데 그들은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죄지을 가능성을 유보하며 되물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죄에 대해 불안해하는지 나타냅니다. 아무도 자신의 무죄를 주장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간의 원죄성이라 불러도 되겠습니다. 특별히 유다가 아니라도 인간인 한 누구라도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고백하는 자세입니다.

  죄 지을까 두려워하는 것은 오히려 인간의 깊은 자기이해입니다. 그러기에 주의 기도에서 우리가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당황하면서도 예수님께 주님(퀴리오스)이라 호칭하면서 자신을 낮추는 자세를 보입니다. 주님이란 호칭은 생명과 용서를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고백입니다. 자신들이 지은 죄를 낱낱이 용서해 주시는 분이시니 죄의 경향성마저 건져주십사하고 겸손하게 간구하는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배반자를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라고 지칭하십니다. 여기서 적신다 동사의 시제가 과거형으로 쓰였습니다. 주님과 함께 화해의 자리에 초대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는 지금 그것을 과거의 일로 돌리고 주님의 화해와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탄식입니다. 진한 안타까움이 배어 나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성경에 기록 된 대로 곧 떠나감으로써 사명을 마무리 짓게 될 것인데 불행선언은 그의 배반이 사람의 아들의 결심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의 태어남을 불행하다고 말씀하시며 안타까워하신 것은 만약 그가 태어나지 않아서 배반 행위가 없었더라도 사람의 아들은 수난의 길을 걸었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의 배반 행위가 반드시 필요하지 않았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이 유다의 배반 행동에 관해 의혹의 질문을 받습니다. 유다의 배반이 예수님의 구원사업에 필요악은 아니었는지 따져 묻는 것입니다. 교회 밖에서 제법 똑똑하다는 분들이 특히 예수님께서 악을 이용하시는 분이 아니냐는 오해를 하면서 질문을 합니다. 배신자는 하느님의 협조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악을 도구로 사용하실 리가 전혀 없으십니다. 죄 자체는 구원사업에 보탬이 될 수 없고, 하느님께서 이용하는 기회도 될 수 없습니다. 죄를 없애시러 오신 분이 죄를 이용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리 중죄인이라 하더라도 용서의 대상은 될지언정 죄 자체를 긍정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굳이 인간의 죄를 이용하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전선하신 당신의 본질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열두 제자에 유다 같은 인물이 포함돼 있다는 사실은 전혀 수치가 아닙니다. 초기 공동체와 복음서 저자들은 자칫 수치와 폄훼를 당할 것을 염려하지 않고 솔직히 있는 그대로 감추지 않고 드러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나약함을 고백하는 것이며 우리가 얼마나 용서를 필요로 하는지 그리고 주님께서 얼마나 인간의 죄를 없애시려 노력하셨는지 보여주는 실증이기도 합니다.

  유다의 언행이 결정적 증거가 됩니다. 유다는 제자들의 질문에 편승해서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질문합니다. 홀로 침묵할 수 없어 가식하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그저 랍비라고 불렀습니다. 용서하시는 주님이라 부르지 못하고 인생의 가르침을 전해주는 랍비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의 무의식 속에 예수님의 자리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 보여줍니다.

  유다는 자신의 말로써 스스로 심판 받고 있습니다. “네가 한 말에 따라 너는 의롭다고 선고받기도 하고, 네가 한 말에 따라 너는 단죄받기도 할 것이다.”(마태 12,37)라는 말씀처럼 스스로 단죄한 것입니다.

  과연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 고백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생명과 은총을 주시는 주님으로 고백할지 아니면 인생의 어려움과 지혜를 가르쳐 주시는 랍비로 스승으로 격하시킬지는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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