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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무소유의 삶-[감곡성당 김웅열 토마스아퀴나스 신부님]
작성자박명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9-04-09 조회수934 추천수4 반대(0) 신고
 
                                                          
 
 
 
 
 

            매괴 성모님 순례지 김웅열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셨을까?

 

율법학자나 돈 많고 똑똑한 사람을 부르지 않으시고
왜 하필이면 비린내나고,  거칠어 보이고 ,어떻게 보면 밑바닥에 살았던 사람들을 선택하셨을까!

 

저는 신학교 때 이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고 이 답을 알아야 신부가 될 터이다!

 

이것에 대한 답이 바로 '왜 우리를 부르셨을까'
'왜 우리를 세례로 부르시어 당신의 아들 딸이 되게 하셨는지' 바로 그 이유가 되겠지요.

 

예수님께서 어부를 부르신 세 가지 이유는

 

첫째, 어부들은 무소유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어부들에게는 내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배 한 척, 낡은 그물, 건강한 몸뚱이 하나 이것이 전부였지요.

 

이 이야기는 '많이 가진 자일수록 포기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라는 뜻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농부를 부르셨다면

"예수님, 제가 가기는 가지만 정리를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음성에 있는 땅 값도 뛰어서 팔아야 하고...

그러니, 예수님 휴대폰 번호 알려 주시면 제가 연락드리지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쉽게 따라 나서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은 나이가 먹고 살 날이 줄어들수록 비워야 합니다.

 

신앙은 비우는 작업입니다.

 

그런데 살아갈수록 숫가락 하나라도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지 않습니다.

 

내 안에서나누고 버릴수록~~
세상의 것이 줄어들수록~~
내안의 예수님은 커지실 수 있을 겁니다.


어느 스님이 신자로부터 몇 백만원짜리 난을 선물로 받았는데
'이렇게 비싼 난을 내 눈으로 볼 수 있다니....'
아침 저녁으로 난촉을 부드러운 천으로 닦아주며 부처님을 바라보기보다 그 난을 바라 보았습니다.
그러나 중이란 것이 일년에 몇 달 동안은 삿갓쓰고 바랑메고 돌아다녀야 하건만~~
도무지 이 난때문에 꼼짝달싹도 못하는 겁니다.
부처님은 어디 가고 어느새 '난' 이라는 우상이 자리잡은 것이지요.
그 스님은 난을 주인에게 되돌려 주고나서야 마음이 홀가분해졌다고 합니다.

 

제게도 그런 소망이 하나 있습니다.

언젠가 내가 죽으면 분명히 장례미사에 신자들이 올것인데~~
장례미사에 왔다가 돌아가는 교우들의 입에서
"야, 오늘 돌아가신 김웅열신부님은  글쎄 가진 것이라고  낡은 양복 한 벌, 수단 하나, 헤어진 구두 한 켤레가 전부래!"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이동할 때마다 나누어 주고 비우는데도 혼자 사는 몸둥이가 왜 그리 짐이 많습니까!

 

'비우는 작업'은 한평생에 해야 할 일이며 곧 '화두'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부는 가진 것이 없기에 쉽게 "네!" 하고  따라 나설 수 있었던 겁니다.

 

어부를 부른 첫번 째 이유는  '무소유의 삶' 이지요.

 

그러나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이 무소유가 아닙니다.
외적으로는 가진 것이 없어도,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복잡한 것을 가진 자가 많습니다.
침묵이란 것이 입으로 얘기하지 않아도 내적으로 시끄러운 사람이 많습니다.

 

무소유라는 것은 '내적 무소유' 를 의미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더라도 내거라고 생각하지 않고 언제든지 필요한 사람에게 줄 수 있다고 하는 '그것으로부터의 자유' 를 뜻하는 것이지요.

 

어부를 부르신 두번 째 이유는 '공동체성'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금은 현대식기계로 자동으로 고기를 잡지만~~
그 옛날에는 항상 공동체생활를 해야했습니다.

바다에 배를 띄우고, 그물을 풀고, 마음을 합하여 그물을 끌어 올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그들은 체험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힘이 센 사람은 힘을 줄여야 하고 약한 사람은 좀 더 힘을 가하며~~

 

사람의 능력은 다 다릅니다.

 

내가 여유가 있으면 얼마나 있겠습니까!
내가 잘 났으면 얼마나 잘 났겠습니까!
내가 재주가 있다면 얼마나 있겠습니까!

 

내가 가진 것은 모두 나의 것이 아닙니다.

 

다는 아니라도 혼자서 오물락조물락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남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고,

더불어 같이 사는 사람들이 훨씬 배려하는 마음이 큽니다.

 

세상을 살면서 기분 나쁘고 밸이 꼴릴 때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나 기분 나쁠 때 참고~~
속이 뒤틀릴 때 인내하며~~
공동체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12사도 가운데 가장 먼저 어부들을 부르신 이유가
그리스도는 시작부터 공동체로 이루어졌음을 우리들에게 말해 줍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어느 한 사람이 구원되기를 바라지 않으시고 공동체가 구원되기를 바라십니다.

 

어느 한 집이 구원되기를 바라지 않으시고 그 전체 식구가 구원되기를 바라십니다.

 

감곡성당 몇 사람이 구원되기를 바라지 않으시고 감곡성당 전체가 구원되기를 원하십니다.

 

교회안의 액션단체에서 우리들은 겸손하고 둥글둥글하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큰 바보이셨듯이 우리도 작은 바보로 살아야 합니다.

 

바보가 많이 있는 성당은 힘이 있습니다.
잘 난 사람이 많은 성당은 수십 억짜리 건물에 으리으리하더라도
그 곳에는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으십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을 어부를 부른 두번 째 이유입니다.

 

어부를 부르신 세번 째 이유는 그들이 '종말론적인 삶' 을 산다는 것입니다.

즉 죽음을 가까이 하는 직업이라는 뜻이지요.

 

갈릴리 호수는 그토록 잔잔하다가도
한 번 서풍이 몰아치면 거센 풍랑으로 바뀝니다.

그 때 가랑잎처럼 떠 있는 뱃고물을 붙들고

 

"하느님, 내 이 두 다리로 제발 땅만 밟게 해 주십시오!"

 

죽음의 밑바닥까지 내려 간 사람은 저절로 하느님을 압니다.

죽음의 문 앞에 까지 가 본 사람은 하느님을 압니다.

 

교통사고로 깡통처럼 찌그러진 차 안에서 살아나온 사람이 만일 냉담자였다면
고해성사를 보고 "주님, 저를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나의 삶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살겠습니다."

이렇게 회두할 것입니다.

 

제가 군종시절에 미사를 여러 군데 다녀 보았는데요.
육군도 보병, 특공대, 공군...
제 기억으로 그 중 가장 신앙심이 두터운 곳은 특전사였습니다.

공수부대는 육신도 한계까지 쓰고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며
낙하산이 2만개 가운데 한 개는 펴지지 않기에 비행기에 오르기 직전에 하는 고해는  고해를 보더라도 총고해를 합니다.
'어쩌다 낙하산이 펴지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른다.' 고 생각하기에

신앙이 가장 뜨겁습니다.

 

그러나 제일 기가 빠진 군인은 방위입니다.
그들은 군기만 빠진 게 아니라 심기까지 빠졌지요.

똑같은 군대밥을 먹어도 이렇게 다릅니다.

 

다시 말하면 편할 때는 하느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꽃밭속에 있을 때 부르지 않습니다.

 

내가 벼랑 끝에 있을 때
내가 늪 속에 있을 때
도대체 어디가 어딘 지 모르는 캄캄한 어둠 가운데 있을 때

죽음을 가까이 느낄 때 우리는 하느님을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순탄할 때는 자신을 보려고 하고, 세상재미를 보려고 하지요.

 

신앙인은 늘 죽음을 묵상해야 합니다.

 

하루 하루가
한 순간 한 순간이
내 생애의 마지막인 듯~~

 

지금 하는 이 미사가 내 생애의 마지막 미사인 듯

지금 하는 이 영성체가 내 생애의 마지막 영성체인 것처럼~~

 

그것이 성인이 되는 길이요.
종말론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숨을 거둘 때까지 늘 기억하고 묵상해야 하는 화두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세가지가 뭡니까?

 

1) 무소유-비우고 삽시다.


욕심도 버리고, 물질도 버리고, 마음도 비워야합니다.

 

2) 공동체적인 삶을 삽시다.


교회안에서 잘난 체 하지 맙시다.
배워야 얼마나 배웠겠습니까?
잘 나야 얼마나 잘 났겠습니까?
가지면 얼마나 가졌겠습니까?

 

오늘 주님께서 내 목숨 걷어 가신다면
그 잘나고, 그 많은 재산, 그 많은 재주 다 써먹을 수 없습니다.

 

그 모든것을 주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매일매일 마지막인 듯 살아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겸손이 오고
입도 절제할 수 있고
기도 중에 분심도 없어집니다.

 

어부를 부른 이 세가지 이유는 바로 '우리들의 존재이유'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살아가야 되는 세 가지 이유입니다.

 

무소유의 삶, 공동체적인 삶을
그리고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 사도 가운데 어부인 네 사람을 부르신이 세 가지 이유가

바로 오늘 우리들을 부르신 이유입니다.

 

이 세가지 이유를 늘 묵상하면서

 

어부들이 그렇게 불리움을 받으셨듯이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심을 깨닫고
주님께서 우리를 축복해 주심을 알고


우리에게도 제자로서의 의무가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하면서
주님께 도움을 청하도록 합시다. 아멘

 

    무소유의 삶- 2006. 01. 22(주일) 느티나무신부님 가르침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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