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엄청난 사건 앞에 선 두 부류의 사람들이 우리 앞에 서 있다. 한 부류는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를 바르러 간 여인들로 부활의 증언자가 되고, 또 한 부류는 무덤을 지키는 경비병들로 부활의 은폐자가 된다. 그들이 느낀 두려움도 달랐다. 천사의 부활 소식을 듣고 되돌아가는 여인들의 마음을 가득 채운 것은 하느님의 놀라우신 일에 대한 두려움이었기에 희망차고 기쁨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경비병들이 느낀 두려움은 어떤 것이었을까? 복음에 그에 관한 자세한 기술은 없지만, 그들이 대사제에게 달려가 보고를 드렸다는 말에서 그들이 부담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현실에만 급급한 근시안적 눈에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조차 그저 현실적 안위에 불편을 끼치는 것 정도밖에 될 수 없었다.
같은 자리에 선 이들의 태도가 다른 것은 그들의 내면 상태가 다르고 체험이 다르고 관심사가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이 ‘태도’라는 것에 따라 우리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살아간다. ‘태도’는 단순히 외적인 형식이나 표현이 아닌 우리 내면의 상태가 그대로 반영되어 나오는 우리 존재의 표현이다. 좋은 태도, 긍정적인 태도, 생명을 주고 기쁨과 행복을 주는 태도는 그 안에 그러한 지향과 그러한 마음 터 닦음의 여정이 전제되어 있다.
닦고 있는 토양 위에 하느님의 은총이 내릴 때 우리는 빛을 주는 태도,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태도로 살게 되고, 우리 삶의 크고 작은 부활 체험을 통해 예수님이 참으로 부활하셨음을 힘 있게 증언하는 증거자로 살게 된다. 증언자와 은폐자의 얼굴이 우리 안에 공존하고 있어 현실을 뚫고 부활의 진정한 가치에 한 발 먼저 눈을 두는 참 믿음의 생활에 늘 깨어 있도록 경각심을 주고 있다.
두 여인과 경비병들이 달려간다. 함께 열심히 달리지만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혀 다른 목적을 갖고 달리고 있다. 우리도 열심히 삶을 살고 있다. 달리고 있다. 하지만 잠깐씩 멈추어 서서 생각하면서 갈 일이다. 증언자의 길인지 은폐자의 길인지, 빛을 주러 가는 길인지 그 빛을 가리러 가는 길인지, 기쁨을 주러 가는 길인지, 분열을 주러 가는 길인지 잠깐씩 ‘태도’를 분명히 하면서 갈 신앙 여정이다.
양옥자 수녀(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전교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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