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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133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4-19 조회수615 추천수2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부활 제2주일]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9-31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0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주간 첫 날과 그 여드레 뒤에 제자들에게 다시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지금 우리의 주일은 로마 태양력에 따른 것이며 유대민족의 연력에 따르면 주일은 토요일이고, 오늘 복음에서의 주간 첫 날은 우리의 주일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지금도 안식일 교회에서는 토요일에 예배를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날짜 계산은 민법의 '초일 불 산입 원칙' 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민족들은 초일을 산입하고 있으므로 우리의 이틀이 그들에게는 사흘이고, 우리의 일곱 째 되는 날이 그들에게는 여드레 째 되는 날이 됩니다. 

오늘 예수님은 '평화가 너희 함께!'를 두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불안, 초조, 공포의 삶은 생명의 삶이 아니라 죽음의 삶입니다. 평화가 곧 생명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목요일 용산참사 현장의 추모미사에서 서울 대교구 빈목 사제단 이 강서 신부님은 평화에 대하여 강론해 주셨습니다. 그 강론 말씀의 일부로 평화에 대한 묵상을 대신하려고 합니다. 

 <1963년, 당시 교황님인 요한 23세가 지상의 평화라는 짧은 회칙을 써냈습니다. 그때는 쿠바 미사일 위기, 미국과 소련이 핵전쟁을 할 일촉즉발의 위기, 세계 평화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교황님이 쓴 회칙에는 우리 모두가 염원하는 평화를 이루기 위해 해야 할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를 소개하면,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중받을 때 평화가 시작됩니다. 인간의 권리와 인간의 의무가 있는데, 인간이 짐승과 구별되고 인간이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받을 권리는 남에게 양도할 수 없고, 남에게 맡겨질 수 있는 권리가 아니고, 각자가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주장하는 권리는 동시에 타인에 대한 의무입니다. 아무도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거나 지키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구호에 불과합니다.>

짧은 회칙이라 하셨으나 회칙을 검색하여 다운받아보니 상당한 분량의 회칙이므로 오늘은 이를 숙독해 볼 생각입니다.

우리가 어떤 책이나 글을 읽고 그 의미를 해석하는 데는 사람에 따라 여러 해석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특히 고전 같은 경우에는 많은 주석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사람의 해설도, 그 어떤 통일된 해석도 그 책이나 글을 쓴 저자의 생각보다 더 우선할 수는 없습니다. 저자가 직접 밝힌 해설보다 내 해석이 더 옳다고 주장하거나 저자의 해설과 다른 해석을 믿으라고 강요하는 그런 일은 상식적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부활과 발현은 어떤 목적으로 기록하였는지를 요한복음서의 저자가 직접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록한 목적에 대하여 이를 저자가 직접 밝혔으므로 이제는 이 보다 더 정확한 해석은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이를 가지고 더 이상 운운하는 것은 독자가 저자보다 그 책의 기술 목적을 더 잘 알고 있다고 우기는 것과 같다 할 것입니다.

어떤 사실을 기록한 것은 그 사실의 진실을 알리는데 주된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 스스로가 어떤 사건을 어떤 목적 때문에 기록하였다고 밝히는 것은 그 사건의 진실을 알리는 관점보다는 저자가 의도하는 어떤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기록하였다는 저자의 진솔한 고백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서의 기자는 부활과 발현사건을 기록한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그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를 다시 풀어보면, 부활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사실을 믿게 하려는 목적으로 기록하였고,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사실을 믿게 하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진실 된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의도이며, 또 예수님의 말씀이 진실 된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한 말씀이므로 이를 믿고 실천하도록 하기 위해서 부활 사건을 기록하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요한 저자 스스로가 이런 고백을 하는 이유는 자신이 기록한 부활과 발현 사건에 대하여는 이를 문자 그대로 믿어서 불필요한 오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독자에게 미리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부활과 발현사건을 아무리 실제로 믿어도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으며, 반대로 부활의 실제 여부와는 관계없이 예수님의 말씀이 진실 됨을 믿고 이를 실천하여 과거의 삶을 반성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 무엇보다 우선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런 복음서 저자의 고백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이 하느님의 실제 아들이냐 아니냐. 또는 부활이 실제적 사실인지 그 여부로, 또 이를 어떻게 믿느냐로 판단하여 신앙의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런 저희들에게 예수님은 요한복음서의 기자의 입을 통하여 내 말이 진실 됨을 믿고 이를 실천하는 것보다 더 우선하는 것은 없으므로 이를 실천하는 것은 이제 남아 있는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유지를 받드는 것이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게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토마스에게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였습니다. 이는 부활한 사실을 믿으라는 뜻으로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요한복음서의 저자가 복음서를 기술한 목적을 망각하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당신의 말씀이 진실 됨을 믿으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하신 이 말씀은 너는 내 말을 의심하며 증명을 요구하였으나 내 말이 진실 됨을 더 이상 의심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민중들에게 널리 전하기 위해서 독자들이 흥미를 가지고 읽도록 신화적 요소를 가미하여 기록한 경전입니다.

그 속에는 예수님의 위대한 가르침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우리 종교의 경전으로 채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기록들의 실제 여부와는 관계없이 그 가르침을 확실히 따르기 위해서, 이를 담보하기 위해서 실제적 사실로 수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목적을 망각하고 실제적 사실로 그대로 고집하여 외부인들과 논쟁한다면 우리 자신들만 더 완고해 질뿐입니다. 이렇게 완고해지면 우리는 이를 방어하는데 급급하여 폐쇄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으므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은 당연히 뒷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완고해지면 유연성을 중시해야 하는 생활 종교인의 자세와는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방편을 고수하다가 목적을 망각하는 이런 우를 범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이런 우를 범할 것을 우려하여 이런 우를 범하지 말라고, 요한복음서의 기자는 오늘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우려는 불행하게도 우리의 현실이 되었음을 묵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역시 하느님이 주신 고귀한 생명의 가치와 의미는 생각하지 않고 물질에만 급급하는 삶은 크게 잘못되었음을 알고 있지만 개선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토마스는 이런 잘못을 크게 깨달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하며 覺者의 첫 一聲을 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언제나 獸性에 머물고 있으므로 오늘은 이를 반성하며 주님의 성체를 모시겠습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은 오늘도 완고한 저희들을 위하여
갈 길을 못 가시고 내 말을 의심하지 말고 실천하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희 들은 가르침의 목적을 상실한 체
방편만을 믿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이런 저희를 성령으로 이끌어 주시어
저희 모두가 죽음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나아 갈 수 있도록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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