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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고발상의 전환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9-04-21 조회수724 추천수8 반대(0) 신고
 
 

사고발상의 전환 - 윤경재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3,7-15)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가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을 만납니다. 그중에 하나가 민수기 21,8절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라는 구절입니다. 이 대목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광야 생활에 지겨워진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자 하느님께서 불 뱀을 보내시어 물어죽게 만드셨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놀라 모세께 나와 뱀을 없애주기를 기도해달라고 매달렸습니다. 그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느님께서 구리로 만든 불 뱀을 기둥에 매달아 놓고 그것을 바라본 자는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현대인의 논리적 사고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불평하였다고 죽음을 내리시는 것이나 기도했다고 구리 뱀을 보면 산다는 주술적 내용이 억지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심하게 말하면 성경에 쓰였으니까 믿자는 말까지 나올 판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사고는 의혹을 남겨두면 병이 됩니다. 의혹이 잠재의식에 남아 결국 믿음을 훼손하고 맙니다. ‘왜, 이렇게 썼는가?’하는 물음을 물어야 합니다.

  하나의 이해방법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현대인과 색다르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저술가들은 하나의 사건을 기술할 때 통일 된 시각을 갖추고 기술했습니다. 한 사건이 끝난 뒤에 회고하니 ‘그 사건 안에 결과적으로 어떤 목적이 숨어 있더라.’하는 시각을 견지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사건을 바라볼 때 논리보다 목적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발견한 목적을 기술하여 ‘결과적’으로 독자가 그 목적을 발견하도록 이끌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 저술가의 의도를 따르는 것이 합당합니다. 어법은 관습이며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인 우리들에게는 민수기 본문 내용을 곧이곧대로 하느님께서 벌을 주시려고 뱀을 풀어 놓으신 것으로 알아듣기보다는, 인간이면 겪어야할 고통과 죽음을 하느님께서 어떻게든 구원해 주시려한다는 ‘목적문’으로 알아듣는 것이 더 이해하기 수월합니다. 하느님께서 뱀을 풀어 놓으실 리가 없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마치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처럼 사고하여 ‘목적문’을 완성한 것입니다. 이런 방법이 그들 저술가의 방식입니다.

  니코데모에게 구리 뱀 이야기를 떠올리시는 예수님의 속마음은 하느님의 구원의지를 깨달으라는 요청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본격적으로 설명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3,17)

  어제가 장애인의 날이었습니다. 정상인으로 살다가 갑작스런 사고로 장애를 얻게 된 분들의 사연을 읽으면 뜨거운 감동을 받습니다. 그들 중 적지 않은 분들이 자기가 당한 사고와 장애가 하느님을 알게 되는 계기였다고 고백합니다. 심지어 새로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장애가 조금 불편하기는 해도 생명을 주신 분께 감사를 올리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런 분들이 하나둘이 아닙니다. 그분들에게 장애를 이겨냈다는 훈장을 달아 준다면 오히려 모독이 될 것입니다. 그냥 우리의 이웃으로 받아주는 것이 더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그들이 보여주는 사고발상의 전환을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장애인을 동정의 대상으로 특별히 대접하고 옆자리에 감추어 두는 대상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들의 자세가 정상인을 성숙에로 이끌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누가 참으로 소경인지 살피라고 예수님은 재촉하셨습니다.

  서울대 이상묵 교수의 이야기가 어제 각 신문에 실렸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지질조사 답사여행 중에 교통사고로 경추를 다쳤습니다. 경추 4번 신경이 다쳐 그 아래 육체는 전혀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는 “사고를 당해 장애인이 되었지만 결코 좌절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나처럼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생활할 수도 있구나.’ 하는 희망을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말합니다. 자기보다 더 심한 장애를 지닌 분들을 바라보며 그래도 감사할 일을 발견합니다. 다행히 머리를 움직일 수 있으니 그 작은 움직임으로 휠체어를 조정해서 다닐 수 있고, 컴퓨터를 이용해서 책을 읽고 연구를 계속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합니다. 두뇌와 심장만 있으면 보람차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이젠 ‘리사이클’ 되어 덤으로 사는 제2막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장애인입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단지 그 전에는 학자로써, 과학자로서 삶을 살았다면 앞으로 장애인의 권익을 위해 노력하는 삶이 하나 더 추가됐을 뿐입니다.”그의 고백엔 비장감이 없습니다. 유머가 흐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고통과 죽음이라는 인간 삶의 모습이 바뀌지 않았지만, 진정한 삶의 의미가 바뀌었음을 깨달으라고 말하십니다. 물과 성령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로 만나 혼인 예식을 치름으로써 새 생명을 잉태하고 탄생시켰습니다. 이제 지속적인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그 변화는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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