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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137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4-23 조회수485 추천수3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31-36

31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32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33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

34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35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36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요한복음서 3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져 있으며 앞부분은 니코데모와 대화이며 뒷부분은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하늘에서 오시는 분’으로 별도로 구분하여 맨 마지막에 기록하여 외관상으로는 세 부분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서 기자의 해설인지 아니면 말씀인지가 불분명하며 말씀이라면 누구의 말인지도 애매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말씀 표시가 없으므로 기자의 해설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세하게 음미하면 말씀부분이고, 더 나아가 생각하면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오늘 복음은 성경 말씀의 배열이 아주 생뚱맞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으므로 후대 산입이라는 그런 오해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더 확인하고자 UBS (United Bible Society)를 번역한 개신교 성경을 확인해보니 오늘 복음의 전체를 “ ” 표시하여 말씀으로 처리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증언한 말씀이므로 우리 성경은 번역과정에서 말씀 표시(" ")를 누락한 것으로 판단되어 집니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관계에서 묵상할 점은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마치고 떠나야 할 세례 요한과 새로운 임무를 가지고 오신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사람은 새로 부임할 분을 높여주고, 새로 부임한 사람은 전임자를 또 높여 주는 것은 동서양의 공통된 미덕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직장 생활을 할 때에 느낀 점이지만 후임자가 전임자를 깎아내려서 자신을 높이려는 사람들이 간혹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더 이상 다른 것으로 판단할 필요도 없이 먼저 인간부터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에서 배울 점은 이런 인간됨됨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신부님들께서도 임기를 마치고 떠나실 때에는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요한 3. 30)성경 말씀을 인용하며 후임 신부님은 인품이 훌륭한 분이므로 그분을 열심히 도와서 교회를 발전시켜 달라는 이임인사를 하고, 또 후임 신부님은 전임 신부님의 업적을 칭송하며 취임인사를 한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이런 미덕은 찾아볼 수 없고 전임자를 죽여야 내가 산다는 이런 풍조가 만연해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이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하시며 예수님의 신원에 대하여 알려준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상징되는 진리의 세계를 이미 깨달았기에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고 세례자 요한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진리의 세계를 모르기 때문에 그분이 진리를 알려줘도 우리는 고집을 피우며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도 욕망에 눈이 멀어서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으므로 하물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전혀 보려고 하지도 않고 알려줘도 믿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거짓된 것에는 왜 그리 잘 속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는 우리가 거짓된 삶을 살고자 하기 때문에 거짓이 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 말씀을 묵상하다보니 '어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서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루카 16, 31)하신 말씀이 절로 생각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이 말씀은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요한 3, 6)하신 말씀을 풀이한 말씀인 듯합니다. 진리의 삶을 사는 사람은 진리의 말씀만을 하는 것이며, 삽질로 살아 온 사람은 삽질밖에는 아는 것이 없으므로 삽질만을 얘기할 것이며, 투기꾼들과 한통속인 사람들은 투기꾼의 이익을 대변하므로 이를 깨달아라! 는 말씀으로 새겨 듣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이 말씀 의미는 논어 위정편에서 이를 잘 풀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공자님은 “나이 일흔이 되어서야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하였습니다. 50세에 하늘의 뜻은 알았지만 일흔이 되어서야 무엇을 말하고 행하여도 天命에 어긋나지 않았으므로 일흔이 되어서야 비로소 天命과 일치된 삶을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예수님도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행하여도 하느님의 뜻에 어긋남이 없으므로 天命을 받아서 이를 행하는 것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공자님보다 더 위대한 것은 공자님은 70세에 天命의 삶을 사셨고 예수님은 30세에 天命의 삶을 사셨습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이런 유치한 비교가 아니라 우리에게 알려준 天命입니다. 우리가 순종해야 할 것은 그 어느 것도 아니며 바로 天命입니다.

우주질서를 주관하신 영원한 진리이신 아버지 하느님은 영원한 진리를 깨달고 이를 그대로 실천하신 당신의 아들에게 모든 권한을 넘겨주셨습니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아버지의 이름과 아드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그릇된 것을 알려주고 있으므로 제대로 된 가르침을 따라야 우리도 영원한 진리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하느님의 진노가 따를 것이므로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도 없다는 '獲罪於天(획죄어천)이면 無所禱也(무소도야)'라 하신 공자님의 말씀으로 오늘 묵상을, 요한복음 3장의 묵상을 마무리합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전부 깨달아 지행일치의 삶을 사셨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하느님의 뜻은커녕 그나마 알려주신 말씀마저도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지도자들은 천명을 바르게 알려주고 솔선하여 실천하시고
저희는 이를 따르며 살아갈 수 있도록
언제나 성령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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