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부활 제3주일 이 모든 일의 증인.......[김웅열 토마스 신부님]
작성자박명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9-04-25 조회수834 추천수7 반대(0) 신고

                                          
                       

 

               매괴 성모님 순례지 김웅열 신부님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알렐루야... 

 

 

 한주일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이때가 되면 전국성당에 자리가 많이 빕니다.

한창 꽃이 많이 피기 때문에.....

오늘 미사 시작하면서 보니 예년에 비해 38명이 빠졌습니다!
38명, 저는 정확히 압니다.

중요한 건 38명이 아니라 헌금125000이 줄어들었다는 거죠^^

다행히 다른 곳에서 40명이 오셨으니 분명히 채워주시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지금 부활 3주일 미사를 봉헌하고자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내가 어느 대학교에 가서 강의를 하면서 대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부처님과 예수님의 차이가 뭐냐?

물어보았더니 중구난방으로 어쩌구저쩌구~~

 

대답을 요약해 정리해 보면

첫째, 헤어스타일이 다릅니다.

예수님은 장발이시고 부처님은 빡빡입니다.

 

둘째, 몸무게의 차이가 납니다.

부처님은 살이 통통 찐 헤비급이고,

예수님은 비지도 못 얻어먹어 뼈와 가죽만 남은 라이트급이나 될까요?


셋째, 출생배경이 다릅니다.

석가모니는 왕궁에 태어나서 그야말로 시종들이 떠받들고 다녔다가 깨달았죠!

그리고 80이 넘을 때까지 사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마굿간에서 태어나셔서

더 이상 낮아질래야 낮아질 수 없는 곳에서

누울 곳조차 없는 가난한 모습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살다가 부처님처럼 수명을 다하고 열반하신 것이 아니라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버림받고,  피 말려 죽이는 고통 속에서 돌아가신 분입니다.


그다음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그 얼굴이 웃으셨습니까?

찡그리고 돌아가셨습니까?


부처님은 아주 인자한 얼굴에 복이란 복은 다 붙은 얼굴입니다.

겉으로 보면 어느 쪽에 매달려야 더 복을 받을 것 같으냐?

부처님 쪽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차이는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겁니다.

부처님은 돌아가셔서 부활하지 못하셨지요?

이것이 부처님과 예수님의 가장 큰 차이입니다.

포인트는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지만 부처님은 부활하지 못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의 맨 마지막 말이 무슨 말로 끝나느냐?

“너희도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

‘모든 일’이 뭡니까?

분명히 예수님께서 ‘모든 일’을 증거 하라고 하셨는데 여러분이

‘모든 일’ 을 알아야 증거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모른다면 이것은 크리스천의 위기입니다.

 

이 모든 일이 뭔지도 모르고~~

한 번도 이것을 증거 한 역사가 없다면~~

이건 직무유기입니다.

 

이건 분명 나중에 죽어서 심판거리입니다.

사제건 수도자건 평신도이건 예외 없이

우리는 분명히 증인이 되어야 하고 증언을 해야 하는데~~

그런데 무엇을 증언해야 하는지 모른다면 얼마나 불행한 종교인이겠습니까?


모든 일이라는 것은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 번째, 예수그리스도는 실제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다고 하고, 그것을 외치는 그런 증인이 되라! 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내 살을 만져보아라!

예수님은 실제 부활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리얼한 액션을 취하시며 “touch!!"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만져 보아라! 유령은 만질 수 없지 않느냐!”

 

예수님께서 당신이 부활하신 것을 알리기 위해
“무얼 좀 먹을 게 없느냐!:

유령은 안 먹어도 삽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생선 한 마리를 구워드리니

뼈다귀까지 쪽쪽 다 드십니다.


우리말에 ‘소생’, ‘환생’ 이란 말이 있습니다.


‘소생’이란 물에 빠져 꼴락꼴락~~

심장이 안 뛰어 응급처치로 살립니다.

물을 토해내면서 ‘후우~~’ 하고 숨을 내쉬며 다시 살아났을 때

이때를 가리켜 '소생' 이라고 말합니다.


‘환생’ 이란 불교적인 용어이며 ‘윤회’를 통해 다시 거듭 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소생하나 환생하나 죽습니까? 안 죽습니까?

물에 빠져 다시 살려냈던 사람도 반드시 죽습니다.


환생하여 개로 살다가 사람이 되었다고 합시다.

그 사람 안 죽느냐?

죽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완전히 죽은 사람이 신비로운 몸으로

다시 살아나 다시는 죽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다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마약하는 사람들이 마약을 먹고 취해 환상이나 환청을 보고서  만들어진 그런 사이비 집단이 아니라는 것을 증언하라는 뜻입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마약에 취해서.... .

아니면 교주의 감언이설에 속아서 인생을 망치는

사이비집단이 아니라는 것을 세상만방에 증언하라는 그 뜻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의 부활로 시작된 종교라고 하는 것을

외치고 증언하고 그 증인이 되라는 그 뜻입니다.

 

그래서 모든 일의 첫 번째 내용은 부활의 실체성입니다


내가 신자로서 살아가는 가장 큰 이유는  살면서

안 아프고 복을 받고 편하게 살려고 성당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도 죽고 난 뒤에는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할 것이라는 부활신앙 때문에 산다는 것을 전하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 모든 일의 증인이 되는 것과 부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십자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증언하라는 그 뜻일 겁니다.

 

십자가는 모든 것이 실패하고 잘못되었을 때

최후수단으로 취하는 조치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계획의 한 부분임을 증언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없는 구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여기 있는 여러분들은 세례를 받으셨거나 아니면 세례를 준비하고 계시는 분들일 겁니다.

세례받은 그날 사제의 입술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억지로 세례 받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억지로 멱살 잡혀 성당에 끌려나와 세례 받은 분들 없으실 겁니다.

세례만 받아 봐라!  꼬드겨서 세례 주신 적 없습니다.

세례만 받아봐라! 병이라고는 감기 한 번 안 걸릴 것이다.

세례만 받아 봐라! 돈벼락을 맞아서 돈 걱정 안하고 살 것이다.

세례만 받아 봐라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주님은 그런 약속하신 적 없으십니다.


오로지 세례 때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단 두 가지입니다.

첫째, 니 십자가 니가 지고 따라라! 

두 번째, 내 왕국은 이 세상이 아니다!

네가 나를 따르려면 분명히 이 세상과 많이 부딪혀야 될 것이다.

그동안 대충대충~~ 설렁설렁~~ 죄도 짓고 살았지만

세례를 받으면 양심이 맑아지고 영이 맑아지기 때문에 많이 힘들 수 있다!

그게 바로 네 십자가이다 !!!

 

우리 신자들은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등신소리 듣는 바보소리 들을 수 있고.....

막힌 인간이라는 소리 들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니 힘든 것 내 다 알고 있을 것이니....

그 보상 네가 죽어서 하리라!‘

주님께서 약속 하신 것은 십자가와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세례 받고 나서 더 힘이 들어요!!!

왜 이리 어려운 일이 많아요!!!

세례 받고 나서 몸에 병이 들었어요!!!

주님은 거기에 대한 약속을 한 적이 없습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입니다.

우리 자매님 목에 금으로 은으로  악세사리처럼 매달고 다니는

그 십자가가 뭡니까?

십자가는 사람을 죽이는 흉물덩어리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예수님이 계시기에 그것이 구원의 상징이 되었죠.

개신교에는 예수님의 몸이 없습니다. 나무때기 두개만 붙여 놓았지요.

그들이 주장하기를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셨는데 거기에 왜 매달아 놓냐?

고 하지만......

부활에 이르기까지 부활이 저절로 이루어집니까?

그곳에 주님이 안 계시다면 그것이 누구의 십자가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 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자리에 계시니까 구원의 십자가가 된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예수님은 그것이 어떤 놈의 십자가인지....

도둑놈의 십자가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매달려 계시기에 그것은 흉물덩어리가 아니요,

피 말려 죽이는 사형틀이 아니라 구원의 상징이 된 겁니다.


그래서 모든 일의 두 번째는 십자가를 증언하라는 겁니다.


십자가 없는 구원은 있을 수 없고 ...

나에게 닥친 크고 작은 고통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절대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만방에 증언하라는 뜻입니다.

살다보면 모욕감, 배신감....미움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영원한 부활은 꿈도 꾸지 말라는 것을 증언하라는....는 뜻일겁니다.


지금 비록 내가 억지로 지는 십자가라도 주님께는 찬미와 영광이 될 수 있고/ 그러니 절망하지 말고 기운을 차리고/예수님처럼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서 골고타로 올라가야한다는 것을 증언하라는 뜻입니다.

십자가 지는 것이 취미인 사람 손들어 보십시오/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고통을 거부하게끔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고통이 신비스러운 이유는 우리가 고통 중에 있으면 외롭고 고독해지며....

그래서 주님을 더 쉽게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억지로 십자가 지고 가는 사람 있습니다.

똥, 오줌 받아내는 시어머니 몇 년씩 억지로 봉양하면서 속으로

 ‘왜 빨리 안 죽어?’ 그러면서 구박도 했지만.....

속으로 양심의 가책도 받습니다.

‘내가 내 십자가 이렇게 마음대로 해도 되나!’

이렇게 지고 가면서 주님 보시기에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키레네 사람 시몬도 기꺼이 십자가 진 것 아닙니다.

구경 나왔다가 “어이, 덩치 큰 너 이리 좀 와 봐!”

이렇게 끌려 나가 억지로 진 십자가입니다.

 

비록 억지로 지는 십자가일지라도 주님은 그동안에 쉬실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는 억지로 지고 가는 십자가로 양심의 가책을 받을 때가 참 많습니다.

“아유, 나 하기 싫은데....”

“아유, 지겨워 죽겠는데. 이것 계속 해야 되나!”

짜증을 내면서 지는 십자가라도 주님께는 찬미, 영광이 될 겁니다.

그래서 실망하지 말고, 절망하지 말고 기운을 내십시오.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넘어지셨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얼마나 위로가 됩니까?

예수님이 한 번도 넘어지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정말 절망해서 일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아무리 온갖 아름다운 말을 해도/ 내 목숨 남에게 주어도/내 콩팥까지 남에게 나누어 주어도/ 십자가를 사랑하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이 세상에 내 가장 가까운 가족들 앞에서/증언하라는 그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증언의 내용입니다.

첫 번째 : 부활

두 번째 : 십자가

이게 바로 ‘모든 일’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증언하는 자는 분명히 자세가 필요합니다.

부활의 무언지 알아야 전하고 십자가의 신비가 무언지 알아야 전합니다.


어느 성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 신자들에게 앙케이트 조사를했습니다.

부활을 믿습니까?

신자 중에 30%만이 부활신앙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충격입니다.

그러니까 70%는 뭐냐?

이 세상 福 빌러 온 겁니다.

이 세상 잘 살기 위해서 절에 가 빌고, 무당한테 가서 굿하는·~

장소만 바뀌었을 뿐이지~~

여전히 성당에 와서도 기복입니다.

30%만이 부활신앙을 믿는다는 앙케이트가 나왔습니다.

이것은 그리스트교가 아닙니다.


증언하는 자는 증언하는 내용을/ 증언하는 자는 진리를

신중하게 전해야 합니다.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진리를 가르치는 우리는 늘 증언할 때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세 번째, 증언하는 자는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 10년, 20년, 30년.... 해서 살다가 죽어도

살아생전에 내가 내 힘으로 사람들 앞에 증언하여 그 사람을 하느님 앞에 단 한 사람도 끌어낸 기억이 없다!

이것 역시 큰 심판거리입니다.

증언은, 증인이 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마지막으로 증언하는 자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동네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면서 부활이요 십자가를 아무리 떠든다 한들 그것이 씨가 먹히겠습니까?

거짓이 없어야 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 부활과 십자가에 대한 힘이 있으려면

자신의 감성과 이성과 의지만으로는 증언할 수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이 나를 지배하여 내 입술을 통해서 말씀할 때 사람들은 변합니다.

사제가 어줍잖은 말재간을 가지고 신자들에게 강론할 때는 신자들을 망칩니다.

‘신부님 떠들어봤자 내용이 없고, 신부님은 당신이 이야기하면서도 당신자신도 그 내용이 뭔지 잘 모르신다!

누구보다 신자들은 예민하게 알아챕니다.

사제 자신이 성령으로 가득 차 있을 때 그  사제의 입을 빌려서 나오는 그 목소리는 하느님의 목소리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치유시킵니다. 그리고 증언할 힘을 줍니다.

성당에 들어 왔을 때의 얼굴과 미사를 끝나고 올 때의 얼굴과 미사가 끝나고 나갈 때의 얼굴을 다르게 만듭니다.


성령이 나를 지배할 때 우리는 부끄럼 없이, 담대하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세상에 외칠 수가 있습니다.

황송하게도 주님이 우리를 증인으로 임명하셨습니다.

법정에서도 재판관이 아무개 아무개, 몇 월, 몇 일, 몇 시,  몇 호법정에 증인으로 출두하시오! 하며는 중환자가 아니면 반드시 출두해서 ‘진실만을 약속할 것을 선언합니다.’하고 증언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증인으로 임명하셨습니다.

우리가 입을 열어 부활이 뭐고....

십자가가 무엇인지 증언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증인으로 임명하셨기에~~

그 책임을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전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아멘.

 

  2006. 04. 30 부활 제3주일 강론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

 

성 마르코 (Marcus) 복음사가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