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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140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4-27 조회수384 추천수4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부활 제3주간 월요일]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22-29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뒤, 제자들은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보았다. 22 이튿날, 호수 건너편에 남아 있던 군중은, 그곳에 배가 한 척밖에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를 타고 가지 않으시고 제자들만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3 그런데 티베리아스에서 배 몇 척이, 주님께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 빵을 나누어 먹이신 곳에 가까이 와 닿았다.

24 군중은 거기에 예수님도 계시지 않고 제자들도 없는 것을 알고서, 그 배들에 나누어 타고 예수님을 찾아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25 그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찾아내고,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27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28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2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복음은 오병이어의 표징을 보이시고 난 후의 상황입니다."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하신 말씀을 접하자 어릴 때의 부끄러운 기억이 떠오릅니다. 저희 고향 마을에는 제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성당이 있었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1932년에 설립되었으므로 77년의 역사를 가진 오래된 성당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외국인을 본 것도 당시 성당에 계신 신부님이셨으며 성당 옆에는 장로교 교회에도 있었으므로 초등학교 다니기 전부터 성탄절에는 사탕을 얻어 먹을 욕심으로 장로교 교회를 갔습니다. 성탄절에는 교회에서 사탕을 나눠주는데 처음 나온 아이들은 사탕만을 주고, 그 전에부터 나온 아이들은 사탕에 연필, 공책 등도 주며 차별을 하고 있었으므로 성탄이전에 교회를 한두 번 더 나가면 성탄절에 선물을 더 많이 받으므로 성탄 2주 정도 앞두고 그때부터 교회에 다니다가 성탄절이 지나면 1년 동안은 다시 교회를 나가지를 않았습니다.

그때에 노래로 배웠던 열두 제자의 이름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으므로 어릴 적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가롯유다하며 음률에 맞춰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기억에는 3-4년 이렇게 하다가 초등학교 3학년 정도부터 치사한 생각이 들어서 그 후에는 사탕 안 먹고 말지 치사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여 성탄 때에도 교회에 나가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린 기억에는 성당은 무척 무서웠습니다. 먼저 키가 큰 외국인 신부님이 무서웠고 한번은 성당 안에 들어갔다가 무서워서 그만 도망쳐 나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성당 스테인 그라스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놀랐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성체에 대하여 이상한 소문을 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더 무서웠는지도 모릅니다.

그 후, 장로교 교회에서는 수시로 옥수수 죽을 끓여서 나눠주고 있었지만 떳떳치 못한 기억 때문에 교회를 가지 않았습니다. 당시는 미국의 지원으로 개신교는 우리 가톨릭보다 재정적으로 더 우위에 있었던 같습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교는 궁휼과 자선사업을 하며 신자들을 모았기 때문에 이런 신자들을 속칭 밀가루 신자라 하며 당시는 오늘 복음처럼 빵이 아쉬웠기 때문에 교회를 다녀야 했던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물위를 걸었다는 것은 바람처럼 가벼워서 자유자재하여야 물위를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 빵을 찾는 군중들과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은 어떤 대비를 하기 위한 것으로 묵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것을 흔히들 세파에 시달리는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여기서 세파는 세상살이를 바다의 파도에 비유한 것입니다. 우리가 빵에 집착하면 욕망의 늪에 빠져들지만 예수님은 이미 욕망의 파도를 극복하였기에 그릇된 욕망을 초월하신 것으로 그런 묵상도 하여봅니다.

모든 종교적 가르침의 공통점의 하나는 자신을 비우는데 있습니다. 자신을 비우는 것은 자신을 죽이고 또 죽이는 일입니다. 자신을 비우고 비워서 더 이상 비울 것이 없으면 空이 되므로 삶과 죽음의 경계도 없어 질 것이므로 모든 분별은 다 없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비울 수 없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 모두에게 주신 하느님의 숨결인 영성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비우는 것이 아니라 욕망에서 비롯된 소원을 빌며 오히려 더 많이 채우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이를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하신 말씀으로 묵상하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하시며 우리 교리적 관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내 아들은 내가 인정하였다고 하여 내 아들이 되고, 내가 인정하지 않았다 하여 내 아들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친자의 관계는 인정의 대상이 아닙니다. '인정'의 의미는 예수님의 모든 언행이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였다는 이런 의미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오셨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곧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오병이어와 같은 예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은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진리임을 믿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것임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도 이를 다시 확인하는 묵상을 하였습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은 비우려 하지 않고 채우려는 저희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육신의 양식만을 얻으려 하고
영원한 생명의 양식은 멀리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상은 영원하지 않기에 끝내 사라질 것임에도
이를 쫒아서 살아가는 저희들에게 지혜의 성령님을 보내주시어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구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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