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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십자가, 행복의 문턱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09-05-17 조회수749 추천수11 반대(0) 신고

 

 

 

부활 6주일 - 십자가, 행복의 문턱

 

 

 

저의 어릴 적 첫 기억은 조부모님의 죽음입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죽음에 대한 공포가 컸습니다. 조금만 아파도 중병인줄 알고 엄살을 부렸습니다.

대신 하나의 꿈이 있었습니다. 바로 ‘행복’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니, 어차피 한 번 죽는 것, 행복하지도 못하면 정말 억울할 것 같았습니다.

죽음이라는 어쩔 수 없는 운명 때문에 살아있을 때 행복해야 한다고 결심하고 그것을 목적으로 살았지만, 행복에 이르려면 오히려 죽어야 한다는 것을 깨우친 것은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습니다.

 

저는 행복하기 위해 먼저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렸을 때부터도 남자와 여자가 서로 만나면 짜릿한 무엇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제일 큰 행복을 느낄 때가 언제일까?’

저는 서로의 사랑이 확인 될 때였던 것 같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지 확신하지 못해 안절부절 하다가, 그 사람도 나를 좋아하고 있음을 알고 서로 사랑을 확인 할 때 가장 큰 행복을 느꼈습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 참 행복’임을 깨달았고, 이는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에 참 ‘행복’을 누리시는 것을 보아도 진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사랑 때문에 행복해진다면 더 완전한 사랑을 하고 싶었고, 그래서 인간적인 사랑보다 하느님의 사랑을 배워보기로 하고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똑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 과연 언제가 가장 행복하셨을까?’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어느 순간에 가장 행복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하실 때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예수님의 생은 온통, 십자가의 죽음을 향해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이루기 전까지는 결코 마음이 편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세상에 오신 사명을 마치시고 ‘다 이루었다.’라고 하실 때 얼마나 큰 행복을 느끼셨겠습니까?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장 큰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가장 고통스럽고, 굴욕스러운 죽음의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남녀 사이의 사랑도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도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지만, 더 큰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사랑으로 인한 고통도 그만큼 더 크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수난을 통하여 당신의 잃었던 애인인 교회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아니 해산의 고통으로 새로운 교회를 탄생시키는 것입니다. 그 고통을 당하는 이유는 바로 새로 태어난 교회와 한 몸을 이루는 사랑을 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하느님께서 처음에 아담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아담이 외로워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를 도와줄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를 깊은 잠에 빠지게 하고 옆구리에서 갈비뼈를 빼내어 하와를 만듭니다. 아담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 만나게 된 하와는 아담에게 한없는 기쁨을 주었습니다. 남자가 여자가 없으면 더 이상 남자인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아담도 자신의 살에서 나온 살이고 뼈에서 나온 뼈인 하와를 보면서 비로소 온전한 사람이 되고 온전한 행복을 느꼈습니다.

마찬가지로 두 번째 아담인 그리스도께서도 당신의 짝인 교회가 없었다면 인간으로의 예수님의 강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아버지와 하나 되는 사랑을 교회와 하고 싶어서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즉, 아버지와 아들이 한 몸이 되는 삼위일체의 사랑을, 아들은 그대로 교회와 이루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느님을 떠나서 제 멋대로 놀아나고 있었고 참 사랑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통하여 세상에 참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두 번째 아담을 십자가에서 깊은 잠에 빠뜨리십니다. 당신 아들의 옆구리를 찢어도 아프지 않도록 깊은 잠, 즉 죽음의 잠에 빠지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론지노의 창에 그리스도의 옆구리가 열립니다.

그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왔는데, ‘피’는 인간의 ‘죄를 씻는 희생’이고 ‘물’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이 ‘피와 물’이 바로 모든 ‘성사’의 원천이고 교회의 탄생입니다. 교회는 성사와 함께 탄생한 것입니다.

세례를 받을 때도 죄가 용서되고 성령님이 오시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된 것은 성령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아버지의 유일한 아들인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하와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지 않고서는 누구도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습니다.

따라서 두 번째 아담의 옆구리에선 ‘피와 물’을 통한 새로운 하와의 탄생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생명을 바치심으로써 교회를 탄생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계명을 주실 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의 의미는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 보여주듯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 즉 ‘생명’까지도 내어주는 사랑을 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결국 당신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실 때 가장 큰 행복을 느끼셨습니다. 그것을 통해 인류와 당신과의 사랑이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이 하와가 태어나는 순간이요, 당신의 짝을 만나는 순간이기에 가장 행복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는 말씀의 목적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즉, 십자가의 온전히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을 통해서만 하느님의 행복에 참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세상이 주지 못하는 참다운 행복은 바로,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죽이는 십자가의 사랑을 할 수 있을 때 얻게 됩니다. 사랑으로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줌으로써 죽음까지 이르게 될 때 신적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행복하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우리 자신들도 못 박히면 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을 실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렇더라도 예수님 당신께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 온전한 신적 행복을 누리는 것처럼, 우리들도 서로 사랑하라는 당신의 계명을 지켜 당신 사랑 안에 머물라고 끊임없이 우리를 ‘십자가의 사랑’으로 초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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