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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여전히 구경꾼이 될 것인가?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9-05-21 조회수502 추천수8 반대(0) 신고
 
 
 

여전히 구경꾼이 될 것인가? - 윤경재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16,16-20)

 

  이 대목에서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라는 똑같은 문장이 세 번 반복합니다. 요한복음에서 3이란 숫자는 강조를 뜻합니다. 틀림없다는 보증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특별한 눈으로 세밀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구절에 ‘보다’라는 동사가 두 번 나오는데 그리스 어 본문으로 읽어야만 그 뉘앙스를 느낄 수 있습니다. 앞에 쓴 동사는 테오레오(theoreo)가 뒤에는 호라오(horao)가 사용되었습니다. 복음서저자가 시적 운율을 위해서 비슷한 뜻을 지닌 다른 어휘를 사용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아주 최소한의 어휘만 사용하는 요한 저자의 특징을 고려하면 숨은 의도가 담겨있습니다.

  테오레오(theoreo) 동사는 ‘구경하다’라는 의미가 담겨있고 호라오(horao) 동사에는 ‘통찰하다, 꿰뚫어보다’라는 뜻이 더 진하게 풍깁니다. 이런 뉘앙스를 염두에 두고 다시 해석해 보면 다음과 같이 새겨들을 수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구경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너희는 나에 대해 훤히 꿰뚫어 볼 것이다.”

  그렇기에 제자들의 슬픔과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변화의 중요성을 세 번씩이나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구경꾼으로 바라볼 것인지 꿰뚫어볼 것인지 선택하여야 합니다.

  요한복음서에서 호라오(horao) 동사가 사용된 중요한 구절을 살펴보면 얼마나 비중 있게 새겨야 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1,50-51절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20,8절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에서 호라오(horao) 동사의 활용형이 쓰였습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 단계로 이끄는 동사입니다.

 

 창세기 28,12절에 야곱이 형 에사우를 속이고 나서 하란으로 도망치는 중에 돌을 베고 자다가 꿈을 꾸었습니다. “그가 보니 땅에 층계가 세워져 있고 그 꼭대기는 하늘에 닿아 있는데, 하느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 그러고는 그곳의 이름을 베텔이라 하였다.”

  야곱은 인간적 욕망으로 속임수까지 사용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한 단면을 상징합니다. 속임수를 써야 하는 인간은 늘 죄의식과 두려움에 싸여 살게 마련입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에는 ‘주님께서 보호하시길’, ‘사기꾼’이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야곱은 과연 이렇게 사는 것이 옳은지 갈등하고 있었습니다. 그 갈등은 자기를 찾는 여정에서 만난 하나의 걸림돌입니다. 약삭빠른 행동보다 어리석음을 상징하는 돌을 부여잡고 잠이 들었습니다. 어리석음이라는 걸림돌을 베고서 야곱은 자기를 초월하는 사다리를 보게 됩니다.

  인간은 자기 초월을 꿈꾸는 동물입니다. 자기를 바라보고 웃을 줄 아는 능력을 지녔습니다. 그것이 인간에게 주신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어릴 적에 그리고 살아가면서 주고받은 상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초월하고자 하는 의지는 하느님께 이끄는 원동력입니다. 본래 사기꾼이었던 야곱은 하늘의 문을 보고 크게 변합니다. 하느님을 아는 지혜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장인 라반의 속임수에 크게 당했지만 원망하지 않는 성숙함을 보였습니다. 자기 삶을 성실히 산 대가로 번성한 자손과 식솔 재산을 이끌고 형이 사는 땅으로 돌아옵니다. 야곱은 형 에사오에게 사죄의 선물을 바치고 뒤늦게 등장함으로써 형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지혜를 발휘합니다.

  야뽁 건널목을 건너 혼자 남은 야곱은 하느님의 천사와 만나 씨름을 합니다. 그 씨름에서 이긴 그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 씨름의 결과 야곱은 다리를 저는 상처를 받았습니다. 외견상 부족하고 장애인이 된 것입니다. 마치 신앙인이 하느님을 고백함으로써 사회에서 미친 사람이나,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불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다리를 절게 된 이스라엘은 이제 예전의 야곱이 아니었습니다. 제멋대로 사는 것에서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어리석게 보이는 인물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 때 새로운 이름으로 축복받는 것은 예수님이라는 걸림돌을 베고 살라는 말이며 어리석게 보이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사람의 아들 어깨를 타고 하늘에 오르내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얼마나 구경꾼처럼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매사에 나와는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지냅니다. 아니 동양인인 우리는 오히려 오불관언 하는 자세를 어떤 경지에 오른 사람인 것으로 착각하고 존경하기까지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구경꾼이 되지 말라고 요청하십니다. 당신을 따르고 닮은 사람이 되라고 요청합니다. 사랑의 성령을 받은 사람은 실천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주님의 길을 따르는 자가 참으로 ‘호라오(horao)’한 사람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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