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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정화는 누구의 몫인가?
작성자김열우 쪽지 캡슐 작성일2009-05-21 조회수349 추천수2 반대(0) 신고

바르고 옳은 것의 실현을 목표로 삼는 정의-

왠지 두렵거나 귀찮아 보이기까지 해 보입니다.

 

그러나 힘없는 약자에게는 사랑의 실현이요, 힘이 됩니다.

어느 한 방향으로 치우침 없이 모두에게 공정하게 그 선익이 돌아가도록 함을 지상목표로 하는 공의이기 때문입니다.

 

힘이나 권세를 가진 사람은 그렇지 않은 약자에게까지 돌아 갈 몫을 챙겨주는 일이 공연한 일이거나, 심지어 부당한 일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어가는 시대-

양심이나 정의를 따르다가,

상대적으로 더욱 약화되어지거나, 종국에는 비웃음거리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해 본적이 있습니다.

좁은 길로 걸으라 는 성경의 가르침 그대로 따르다가,

완주도 하기 전, 지쳐 쓰러져,

차라리 가지 않음만도 못한 결과를 얻는 것이 아닌가? 라는 염려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좁고 험난하기만 한 정의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좋아라 따라 나섰던 사람들이,

길가에 떨어진 씨앗처럼, 마귀에게 말씀을 빼앗겨 돌아서고 맙니다.

돌짝밭에 떨어진 씨앗처럼, 세상의 모진 고난이나 시험을 견디지 못해 돌아서고 맙니다.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앗처럼, 돈과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 돌아서고 맙니다.

 

세상은 마치,

불의와 불법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처럼,

하느님은 안계시고, 악마가 주인인 것처럼,

오인될 정도입니다.

 

SBS 드라마, 씨티 홀 을 잠시 시청하였습니다.

불법을 지탄하여 시위하는 사람을 방어하기 위한 방안으로, 그의 측근에 불이익을 끼쳐, 결정타를 입히려는 장면이었습니다.

정말 말로는 부르짖기 쉬운 정의-

지키고 실현하기위해서는 얼마나 큰 희생과 눈물, 땀이 요구되는 것인가?

우리가 쉽게 생각하고, 간과하기 쉬운 내용들이 그대로 담겨있는 소중한 드라마였습니다.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권리 역시,

이처럼 누군가의 눈물겨운 헌신과 희생의 노고의 덕일 것입니다.

 

누가,

정의 사회를! 부르짖어,

모처럼 정의의 깃발이 드높여진다 하여도,

실상 낙타는 모두 걸러지고, 걸려든 것은 어쩔 수 없이 가담하였던 가여운 하루살이들 뿐인 것입니다.

 

서민을 위하여 만든 제도가,

부유한 사람들의 부를 더욱 늘려주는 투자처가 되어,

이미 지녔던 터전마저 빼앗겨 울부짖는 서민들의 하소연을 T.V.에서 본 일이 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정의 사회의 실현을 향한,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밝혀주시는 방송, 매스컴의 막대한 희생과 노고의 기여에 감사드리며-)

사람들이 실현하고자 하는 정의가 빚어낸 오류일 것입니다.

애초에 지향하던 선한 구호와 달리, 불의라는 빈대를 잡겠다며, 초가를 불태울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역작용을 빚어내며, 약자를 더욱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할 수도 있습니다.

불의의 사람들이 실현하는 정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예화에,

좋은 씨를 가려 뿌린 밭에, 가라지가 나왔습니다.

뽑아 버릴까요? 라고 묻는 종에게 주인은,

원수가 몰래 한 짓이다.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해칠까 두려우니, 추수 때까지 그대로 두었다가 추수 때에 묶어 불태워버려라. 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들이 잘못을 저지르는 그때, 그때, 매를 드시어 다스리신다면,

약자가 불이익을 당하거나, 힘 센 자가 만행을 벌이는 불법이나 불의가 사라져,

세상은 평화로울 터인데.라는 생각을 해 본적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로봇이나, 인형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와 판단으로,

생명나무나 선악과,

선이나 악,

하느님 또는 악마의 선택을,

장차 자신이 거처할 천국이나 지옥의 건설을,

사람 자신, 스스로의 몫으로 맡기신 것이니까-

 

하느님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며,

승리하여 이길 때까지,

끝까지 참으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시니까-

 

세상은 결코 이상적인 유토피아가 아닌,

좁고 협착한 길을 찾아 걸어야 하는 순례의 길이니까-

등등의 이유를 생각하며 불의를 향한 분노와 울분, 참담한 심정을 삼켜버리곤 합니다.

 

그런가 하면,

노아가 살았던 세상의 불법과 불의는 홍수로 멸망을 받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열 사람을 찾을 수 없어서 유황불로 멸망 당했습니다.

예수님은 믿는 사람들의, 세상을 향한 빛과 소금의 사명을 말씀하셨습니다.

 

먼지로 뒤덮여, 본래의 색깔이나 모습이 아득하였던 만물이,

지난 밤 사이 내린 비에 말끔히 씻기워,

녹음은 더욱 푸르고, 하늘은 더욱 드높고, 태양마저 금빛을 한층 더 합니다.

 

하룻밤 사이,

희뿌옇게 드리워졌던 먼지나 스모그는 사라져 오염된 대기는 맑고 깨끗해졌습니다.

신선한 새 아침, 새소리마저 청아합니다.

스스로의 정화와 치유력이 있어서 인간이 더럽혔던 오염까지 말끔히 청소하는 자연-

신비롭기만 합니다.

 

만물의 영장, 인간은 누구보다도 좋은 환경을 선호합니다.

좋은 물과 공기를 찾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만인이 공유하여야 할,

오염되지 않은 지대까지 올라가 별장을 세워 또 다시 오염시키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빛과 소금의 직분은,

인류 모두의 생존을 위하여,

필히 보존하고 지키며,

만인이 공유할 환경의 지킴이이며,

정의의 수호자입니다.

 

그것은,

특정한 누구의 몫이라기 보다,

스스로와 온 인류를 위해 실현하여야 할 자신 스스로의 몫인 것입니다.

 

자연이 스스로를 치유하며, 청소하듯이,

스스로를 치유하며 청소하여,

사람 살만한 쾌적한 환경을 만드는 것이,

빛과 소금의 사명의 수행입니다.

 

오염된 세상을 정화시키는 것-

불의의 사람(일반적 모든 사람을 지칭함)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어렵게 만들거나, 악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짐하며, 스스로를 돌이키는 회개와, 하느님의 말씀,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혼자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동참하지 않고서, 십자가의 선익에 참여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날로 어두워져만 가는 세상-

자신 만이라도

빛과 소금이 되어,

한 사람의 의인이 되어,

우리의 환경이,

소돔이 되지 않도록,

고모라가 되지 않도록,

지켜야 할 것입니다.

어둠을 밝혀야 할 것입니다.

2009년 5월 21일 오전 8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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