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16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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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순 | 작성일2009-05-22 | 조회수429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오늘의 묵상입니다. [부활 제 7주간 금요일] <너희의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21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22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23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2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24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복음을 게시하며 부득이 내일 복음의 일부(23,ㄴ-24) 말씀을 함께 게시하였습니다. 어제 말씀과 오늘 말씀 그리고 내일 일부 말씀은 모두 한 말씀인 "......." 형태로 되어 있는 하나의 말씀입니다. 이를 3일에 걸쳐서 나눠서 묵상하고 있으므로 오늘은 이를 하나의 말씀으로 다시 묵상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가끔 느낀 점은, 하나의 말씀인 "......." 형태로 된 말씀은 가급적이면 말씀을 나눠서 선정하지 말고 하나의 말씀으로 묵상할 수 있도록 전체 말씀을 선정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갖고 있습니다. 말은 그 특성상 끝까지 다 들어봐야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이며 끝까지 다 들어보지 않고 미리 속단하면 많은 오해가 생기는 경우를 일상생활에서도 흔히 접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도 하나의 말씀은 나누지 않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어제 말씀과 연결하기 위하여 오늘 복음은 20절을 어제에 이어 오늘도 같이 선정하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는 사실에 대하여 몇 가지 이유를 들어서 알려주고 계십니다. 그 이유 중 첫 번째는 그래야 성령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너희는 애통해 하겠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더 좋다는 이유를 오늘은 해산의 기쁨에 비유하고 계시며 그리고 세 번째는 내가 떠나야 너희들이 하느님께 직접 청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세 번째 이유는 내일 복음으로 선정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세 가지 이유를 들어서 설명하고 계시지만 결론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하신 내일 복음 말씀에 모두 수렴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출산의 고통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은 앞으로 일어날 이별의 고통은 출산의 고통처럼 새 생명이 태어나는 기쁨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씀이므로 지금 우리 삶이 아무리 각박하고 힘들더라도 인내를 갖고 이겨나가면 희망의 내일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므로 비록 지금 우리가 힘들더라도 희망을 잊지 말고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아마 우리에게 이런 희망이 없다면 지옥이 따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희망을 앗아가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 사회가 더 각박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발 희망의 끈인 삶의 터전만은 남겨두고 빼앗아 가도록 기도라도 드려야 할 요즈음입니다.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게 되면 서로 상면하는 것이므로 제자들도 예수님을 뵙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의미는 저희들이 예수님을 바르게 알게 되면 진리를 터득한 희열을 느낄 것이며, 진리를 터득한 희열은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다는 말씀으로 묵상하고 있습니다. 이런 진리를 터득했다면 나는 더 이상 너희에게 더 알려줄 것이 없으므로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하신 말씀으로 오늘 말씀의 묵상은 마무리하고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하신 내일 복음을 오늘 미리 묵상하겠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요한 11.9)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또 조건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조건은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요한 15,7)하신 말씀에서 ‘예수님과 저희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일 복음에서는 이런 조건이 "내 이름으로" 다시 변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내 이름으로" 하신 이 말씀의 의미는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하신 말씀과 같은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아무리 하느님께 기도하여도 '예수님과 저희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말씀하였다고 하여 예수님! 예수님! 하느님! 하느님! 하며 열심히 기도하면 예수님이, 하느님이 우리의 청을 들어 줄 것이라고 일부에서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이런 터무니없는 말씀을 하실 분이 아닙니다. 이 말씀에서 “내 이름”의 의미는 자비를 실천하고, 사랑을 실천하고, 진리의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며 자비를 청하고, 사랑을 청하고, 진리를 청하면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청을 모두 들어주시고 계실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의 신앙생활은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바른 가르침이 이 땅에서 부활하여 우리 모두가 이를 등불삼아 주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며 오늘 묵상을 마칩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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