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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뿜' - [유광수신부님의 복음묵상)
작성자정복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5-22 조회수497 추천수2 반대(0) 신고

'기쁨'(요한 16,20-23ㄱ)

-유광수신부- 
 

용미리 납골당에 가면 고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는 곳이 있는데 그 내용을 묶어서 출판한 책이 "하늘 나라 우체국"이다. 거기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아버지 돌아가시리라 생각 못했는데....
꼭 회복하시리라 생각했는데...
내 마음 불편할까봐 끝까지 음식을 먹어 주셨던 아버지. 겸손과 근면, 남에 대한 배려....

나는 아버지처럼 살기 힘들 것 같아요. 왜 그리 겸손하셨어요? 왜 그리 부지런하셨어요? 왜 그리 절약하셨나요? 왜 남에 대해 배려하셨나요?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병도 나지 않고 더 오래 사셨을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돌아가시는 날도 우리를 배려해 일부러 맞춰 놓으신 것처럼 아이들 방학 때 돌아가신 아버지. 모두들 아버지처럼 산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평화로울까요? 아버지한테 자랑스런 자식도 못되어 드리고 아버지 마음도 잘 헤아리지도 못하고. 용서해 주세요. 꼭 용서받고 싶어요. 길을 가다가 아버지와 비슷한 사람을 보면 깜짝깜짝 놀란답니다. 우리 아버지인가 하고요. 아버지, 가시는 길 편안하게 가시고 좋은 곳에서 잘 계세요. 나중에 만나요.

 

우리 가족은 다섯 손가락이었다.
아빠가 계실 때까지는 그랬다.
갑자기 엄지 손가락이 없어지면서 우리는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아픔을 느꼈다.
대단히 큰 아픔이었다.
모든 손가락을 받쳐 줄 만큼 강한 힘을 가진 그런 손가락이 없는 지금,
남은 우린 아픔 속에서, 불편함 속에서
자연스럽지 못한 모습으로 힘들어 하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아빠 앞에 서 있으니까 아빠 손도 잡아 주고 싶고, 안아 보고 싶고 그렇다.
내 손이 차가워서 아빠가 잘 잡아 주고 그랬는데. 어디 다닐 때면 아빠 팔짱 끼고 다니구.
아빠가 나 머리 쓰다듬어 주면 잠이 솔솔 오고 그랬는데.
나, 아빠랑 해 본 게 많아서, 아직도 아빠랑 같이 하고 싶은 게 많아서 그래서.... 그래서 너무 보고 싶어. 사랑하는 아빠, 내가 너무 좋아하는 우리 아빠.

 

어머니 손을 잡고 꼬불꼬불 논길 따라 눈 덮인 기찻길을 따라 이 마을 저 마을 따라다니던 그 시절 장사하던 때가 그리워요. 어머니는 주린 배를 조여 매면서도 아이들을 위하여 아랫목 이불 속에 보리밥 넣어 두었다가 싸 주시던 점심 도시락. 어머니 사랑이 크고 한이 없어 갚을 길 없네요. 생전에도 어머니 사랑 크시고, 돌아가신 후에도 크신 사랑 잊을 길 없어 오늘도 다녀가요.

 

한 자 쓰고 한 방울 !
두 자 쓰고, 두 방울!
일 천 개의 글자들이 눈물 색으로 변하여도, 울어 보아도 시원치 않습니다. 목이 터져라 불러 보아도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 같아 속죄하는 마음으로 몇 자 적어 봅니다.
엄마! 정말로 따뜻하게 마음속으로 불러 보고 싶었는데, 이제야 생활에 여유가 생기고 주변을 돌아볼 수가 있게 됐는데 꼭 떠나셔야만 했는지요?
누가 불렀기에 그토록 바쁘게 떠나셨어요?

사랑으로 채우려 해도
채울 수 없는 건
어머님의 빈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 빼앗지 못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제자들이 다시 보게 되면 얼마나 기뻐할 것인가? 죽었던 이를 다시 만난다는 것은 꿈속에서라도 다시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바램이고 그것이 사실로 이루워졌을 때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이 말씀이 나와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제자들에게는 위로가 되고 기쁨을 줄 수 있는 말씀이겠지만 나와는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 보낸 이들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다. 사랑하는 이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은 그리고 만나서 기쁨이 될 수 있는 사람은 그리워했던 엄마 아빠의 모습이지 예수님을 다시 뵙는 것이 그들의 큰 기쁨은 아닐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3 년동안  함께 생활했으니까 죽으셨던 분을 다시 보게 되면 기뻐하겠지만 한번도 예수님과 함께 생활을 해보지 못한 우리들이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된다고 해서 과연 기뻐하게 될까? 예수님이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아무런 정도 없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보게 될 때 정말 기뻐하게 되려면 우리에게 친숙한 모습이어야 한다.  엄마를 잃어버린 이에게는 엄마의 모습으로 다시 볼 수 있어야 하겠고, 아빠를 그리워하는 이에게는 아빠의 모습으로 다시 뵙게 되어야 할 것이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지금 우리의 사고 능력으로는 불가능하게 생각되겠지만 영적으로 성숙하게 되면 우리의 인식도 성장하기 때문에 지금과는 다른 차원의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잘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영적으로 우리가 성숙해지면 생각이 달라지고 느낌도 달라지고 따라서 기쁨과 평화를 느끼는 것도 달라질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영적으로 성숙해지면 육적으로 느끼던 것과는 다른 영적인 맛이 있고 그것은 이 세상의 인연으로 얽메여 있지 않는 그 이상의 것이어야 할 것이다.

 

즉 이 세상 그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었다 하더라도 그 관계에 얽메이지 않고 그 관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리라.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우리에게서 빼앗지 못할 기쁨이라면 그것은 외부적인 환경에 지배받는 것이 아닌 내 마음에서 솟아나는 기쁨이어야 한다. 그것이 부활의 기쁨이 아닐까? 아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만이 맛보는 기쁨이 아닐까? 그것이 예수님이 정말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은혜가 아닐까?


이 기쁨은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고 말씀하셨던 대로 영적으로 새로 태어날 때만이 가능한 것이리라고 생각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했다고 해서 놀라지 마라."(요한 3,5-7)고 했던 영적으로 태어난 사람만이 맛 볼 수 있는 기쁨이리라. 

 

깨달음에 이르는 사람, 소위 말하는 도통한 사람은 결코 이 세상 것에 얽메어 있지는 않는다.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깨달음에 이른다는 것은 부활하는 것이다. 부활은 새로운 태어남이다. 이 부활은 죽은 다음에나 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부활해야 한다. 부활하면 그 누구도 우리에게서 그 기쁨을 빼앗지 못할 것이다.                 

 

제 1권 "다가오시는 예수"를 갖고 함께 묵상나누기를 하면서 어느 자매가 다음과 같은 자신의 묵상을 글로 표현하였다. 이 자매의 글로 표현한 것이 바로 예수님을 다시 만난 기쁨이리라. 그 기쁨은 아무도 그 자매에게서 빼앗지 못할 기쁨이리라.

 

감사합니다. 주님 !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고 부르셨는데...
파아란 잔디 위에서도 잔잔한 호수가에서도
때로는 떠오르는 아침 태양과 같이 저무는 낙조의 여울 속에서도
그분은 밤낮없이 손짓하셨는데도...
스쳐가는 바람소리에서도
노도와 같은 파도 속에서도 당신의 손길 속으로 이끌어 주셨는데도...
나는 외면하고 뒤돌아서며 눈길도 마주치지 않했는데도....

그분은 조금도 섭섭해 하시거나 노여워 하시지도 않으셨으며
끊임없이 기다려 주시며
나는 방황의 끝자락에서 지치고 죄절과 절망 속에
일어설 수 없이 누워있을 때에
그분은 살며시 내 손을 잡아 주시며
"나다. 일어나거라. 나와 함께 가자."하고 나를 일으켜 주시는 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그 한 말씀으로
내 온 생애의 모든 어둠과 죄를 용서해주신분,

아무런 조건도 없이
사랑이라는 한 말씀으로 죽음의 긴 터널에서
생명의 길로 이끌어 주신 내 사랑의 주님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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