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23일 토요일[(백)부활 제6주간 토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복음>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23ㄴ-2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24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25 나는 지금까지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비유로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너희에게 비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아버지에 관하여 드러내 놓고 너희에게 알려 줄 때가 온다.
26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27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28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마음이 환해지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면 바로 주신다니 고마운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겁습니다. 정말 그럴까 하는 의구심 때문입니다.
기도는 자동 인출기가 아닌데도 은연중에 그런 생각을 갖습니다. 자판기처럼 조건을 채우면 금방 결과가 나올 줄 여깁니다. 하지만 기도는 강요가 아닙니다. 글자 그대로 ‘비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정성과 인내가 핵심입니다. 결과는 온전히 주님께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청원을 드릴 뿐입니다.
예수님의 이름도 아무렇게나 부를 수는 없습니다. 이익과 욕심을 위해 그분의 이름을 내세운다면 곤란한 일입니다.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숨은 이유’이지요. 옛사람들은 높으신 분의 이름은 쉽게 부르지 않았습니다. 작명할 때에도 겹쳐지는 한자는 피했습니다. 그러기에 사대부들은 달리 사용하는 이름이 많았던 것입니다. 모두가 이름을 대하는 정성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기도를 통해 힘을 얻고 은총을 체험했는지 모릅니다. 그들에게 기도는 설명도 아니고 이론도 아닙니다. 그냥 ‘매일의 생활’입니다. 예수님께 말씀드리는 일상사의 하나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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