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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절망해서는 안 된다......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작성자박영미 쪽지 캡슐 작성일2009-05-27 조회수830 추천수8 반대(0) 신고
절망해서는 안 된다................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2009년 5월 12일 강론)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죄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십니다. 죄가 크면 클수록 더 큰 자비로 다가오십니다. 주님께서는 '죄인의 구원'을 위하여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죄의 감각에 무뎌져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사람은 저마다 자기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 앞에서 자기 생명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생명의 최고 주권자는 바로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생명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 하느님의 영광과 우리 영혼의 구원을 위해 보존할 의무가 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생명의 관리자이지 소유주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다.”(가톨릭교리 2280)

 “자살은 자기 생명을 보존하고 영속시키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적 경향에 상반되는 것이다. 또 올바른 자기 사랑에도 크게 어긋난다. 그와 동시에 자살은 이웃 사랑도 어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살은 우리가 고맙게 생각해야 하는 가정, 국가, 인류 사회와 맺는 연대관계를 부당하게 파괴하기 때문이다. 자살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사랑에 어긋나는 것이다."(가톨릭 교리 2281)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자살자의 교회장례식을 거부하였습니다. 1917년 교회법 1240조에 보면 1). 파문 선고를 받은 자 2). 의도적인 자살자 3). 결투로 죽은 자를 장례식이 거부되는 자로 명시하였습니다. 그런데 1983년 개정된 교회법 1184조에는 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습니다. 1184조는 1917년도 교회법 1240조를 간소화한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1). 공공연한 배교자들과 이단자들, 및 이교자들 2). 그리스도교 신앙을 반대하는 이유로 자기 몸의 화장을 선택한 자들 3). 신자들의 공개적 추문이 없이는 교회의 장례식을 허가해 줄 수 없는 그 밖의 분명한 죄인들”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의 영원한 구원에 대해 절망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만이 아시는 길을 통해서 그들에게 구원에 필요한 회개의 기회를 주실 수 있다. 교회는 자기 생명을 끊어 버린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한다.”(가톨릭교리 2283) 고도 가르칩니다.

 그것은 큰 잘못을 저지르고 죽었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자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간구해 주어야 합니다. 때로는 미사를 봉헌하고 장례식을 거행합니다. 그 사람의 자살을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 잘못은 범했지만, 아버지의 큰 품으로 받아주는 것이요,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으로 감싸주는 것입니다. 애절한 마음으로 그를 사랑해 주지 못한 안타까움 속에 하느님께 맡겨 드리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12절에 보면 “입법자와 심판자는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구원하실 수도 있고 멸망시키실 수도 있는 그분이십니다. 그대가 누구이기에 이웃을 심판한단 말입니까?”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에 맡기는 일입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야고2,13)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잘 보존하고 지켜야 합니다. 하느님만이 그 시작부터 끝까지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목숨을 직접 해칠 권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그 안에 주님께서 함께 아파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혼자만이 겪는 아픔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로 부터 와서 하느님께로 돌아가는데 있어서 그분 뜻에 걸맞은 삶을 살다가 존엄하게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참고로 화장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화장은 자연법이나 하느님의 실정법에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다. 매장과 화장은 시체의 변화에 근본적인 차이가 없고, 물질 불멸의 원칙 면에서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매장은 시체가 천천히 소멸되는 것이고 화장은 빨리 소멸되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매장이나 화장은 육신의 부활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습니다. 따라서 화장은 가톨릭교리에 직접 반대되는 것은 아닙니다. 화장은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화장을 금하였던 것은 화장을 주장하는 자들의 악의 때문이었습니다. 프랑스 혁명(1789년) 이후 근대에 이르러 가톨릭 교회를 반대하는 뜻에서 매장된 시체를 파내어 화장하는 중대한 범죄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19세기에 유물론을 주장하며 교회에 대한 증오심이 강한 이들이 경제적 위생적 이유를 내세워서 화장을 주장하였습니다. 이들은 교회장례식이 결부된 교회의 영향력을 배척하는 동시에, 장례와 죽음과 매장의 신성한 의미를 속되게 하며 부활과 영생에 대한 신앙을 파괴하려는 뜻에서 교회의 전통적인 매장을 반대하고 화장을 주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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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olphe William Bouguereau(1825-1905)의< 최초의 슬픔-아벨의 죽음(The First Mourning)>,1888

이 그림은 창세기 4장에 나와 있는 아벨과 카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인류 최초의 살인이라 일컬어지는 이 사건을 화가는 아담과 하와의 입장에서 바라본 작품이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쫒겨 난 후, 고달픈 인류의 삶은 시작된다. 하느님의 축복으로 얻은 아들 중 그토록 사랑하는 작은 아들, 아벨을 잃었다. 그것도 형제인 카인의 손에.

이 작품의 극적 상황은 인류가 최초로 겪은 비통함이라 하겠다. 육체적 고단함보다도 더욱 잔인하게 그들을 슬픔의 늪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사랑하는 이를 잃은 애끓는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아담의 왼손은 자신의 심장을 향해 있다. 억누르기 힘든 감정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그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애통해 하는 하와의 모습 또한 슬픔을 참지 못해 흐느끼는 모습이 보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아담의 무릎에 길게 누워있는 아벨은 살아생전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것처럼 보인다. 죽어서도 아들을 한 번이라도 더 품어보려는 부모의 심정과 벌써 죽음이 많이 진행되어 푸른빛을 띈 모습 속에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 굵은 사슬이 되어 시간을 멈추게 하고 있다.

 

..............신부님의 훈화 및 강론 말씀을 읽다가 5월 12일에 강론하신 말씀이 도움이 될까 하여 가져 와 보았습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신부님 말씀대로 하느님께로부터 와서 하느님께로 돌아가는데 있어서 그분 뜻에 걸맞은 삶을 살다가 존엄하게 돌아가야 한다는 말씀을 가슴에 새깁니다. 또한 주님의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며 교회를 중심으로 일치를 이루는 일일거란 생각도 해 봅니다. 우리가 해야하는 바와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함께 생각하여 평화와 일치로 나아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길 간절히 빕니다.  오늘도 주님 안에 모두가 평화로운 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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