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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5월 31일 야곱의 우물- 요한 20,19-23/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9-05-31 조회수420 추천수5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 20,19-­23)
 
 
 
 
성령께서는 천지창조 때부터 시작하여 구약시대는 물론 신약시대에도 쉬지 않고 활동하셨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예수님 시대에 접어들면서 더욱더 힘차게 활동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고(루카 1,35 참조), 세례를 받으실 때도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셨고(마르 1,10 참조), 성령의 인도로 광야로 가셨고(마태 4,1 참조), 성령으로 말미암아 십자가 위에서 희생 제물이 되셨고(히브 9,14 참조),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활하셨습니다(로마 1,4 참조). 또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모인 자리에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나에게서 들은 대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기다려라.”(사도 1,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순절이 되었을 때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사도 2,1­4 참조).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자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를 발라 드리기 위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뜻밖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만나는 사람에게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 하며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바로 그때 제자들은 예수님과 최후의 만찬을 가졌던 다락방에 모여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요한 20,19) 있었습니다.
당시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갔다.”(마태 28,13)라고 소문을 내라고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부활의 말을 함부로 입에 담기에는 위험한 때였습니다. 제자들 역시 마리아 막달레나한테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믿지 못하고 다락방에 숨어 문을 잠그고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다락방의 모든 문을 잠근 것만이 아니고 마음의 빗장까지 잠갔습니다. 이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20-­21)라고 두 번씩이나 말씀하셨습니다. 평화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모든 것이 다 끝나고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일으킴 받은 그 자리에 생기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에페 2,14)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정상적인 자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 평화가 깃드는 것이지 평화는 물질이나 명예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은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자기 자리를 이탈했기 때문에 ‘평화’가 없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창세 3,9) 아담은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창세 3,10)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잠재적으로 마음 깊은 곳에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그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자리를 이탈해 세상의 자리에 마음을 쓰며 살아갈 때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있고 싶은 자리’에 있지 못할 때 불안해하면서 자기 자리를 찾고자 평생을 노력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자리를 찾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 돈을 버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교수다, 사장이다, 의사다.’ 하고 자신의 자리를 알리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를 내세우는 자리를 찾아 애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이런 자리는 세상이 요구하는 자리는 되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자리는 아닙니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이탈했을 때 하느님께서는 “너 어디 있느냐?” 하고 찾으십니다. 이때 우리는 하느님이 두려워 숨게 됩니다(창세 3,10 참조). 하느님은 우리를 부르시지만, 사람이 죄를 지으면 죄의 공포가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도록 숨게 만듭니다.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 숨게 되면 평화도 잃어버립니다. 참된 평화는 하느님께서 주신 자리에 있을 때 찾아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에페 2,17) 우리가 하느님께서 원하신 자리에서 평화를 누리려면 성령과 하나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지 않으셨기 때문에, 성령께서 아직 와 계시지”(요한 7,39) 않았으므로 제자들은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마태 26,74)라고 예수님을 부인했고, 예수님께서 붙잡히시자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마르 14,50) 달아났으며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네.”(요한 21,3) 하며 각자의 삶터로 돌아갔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해 제자들은 이제 십자가 뒤에 불어닥칠 엄청난 핍박이 두려워 마음을 졸이며 지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셨던 말씀도, 예수님과 함께했던 기쁨도 어느덧 다 잊어버리고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직접 훈련을 받았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가장 많이 본 사람들입니다. 절름발이가 걷고 소경이 눈을 뜨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도 보았고, 심지어 자신들이 기적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고 자부했습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부활을 의심하고 주변 환경에 대해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다락방에 숨어 문을 꼭꼭 잠그고 있었습니다. 두려우면 저절로 마음의 문을 닫게 마련입니다. 제자들이 부름 받은 것만으로는 제자가 아니고, 또 교육받았다고 해서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름은 제자인지 모르나 실제는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성령을 받아 참된 제자가 되길 바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이 다락방에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3)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고(14,17 참조), 모든 것을 가르치고 기억나게 하는 분이시기에(14,26 참조), 성령은 예수님과 하나 되어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하도록 도와주시고, 예수님의 말씀을 삶에 적용하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진리의 성령께서는 우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시기에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잃어버린 기쁨을 찾았고, 절망했던 마음에 다시 용기를 얻어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우리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 태어나 부활의 증인이 되어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갈라 5,22)의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은혜를 청합시다. ●
정애경 수녀(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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