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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6월 7일 삼위일체 대축일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6-06 조회수764 추천수10 반대(0) 신고
  
 

6월 7일 삼위일체 대축일-마태오 28장 16-20절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베일에 싸여있기에 매력적인 하느님>


    다시금 ‘공포’의 삼위일체 대축일이 돌아왔습니다. 오늘은 우리 신부님들, 스트레스 많이 받는 하루입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난해하고 심오한 하느님, 짧은 인간의 지혜로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삼위일체의 하느님, 도무지 인간의 오관으로는 도무지 포착되지 않는 하느님, 아무리 기를 써도 감지할 수 없는 삼위일체의 하느님에 대해서 신자들 앞에서 어떻게 해서든 말씀하셔야 하니 부담이 이만저만 아닐 것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삼위로 존재하시는 하느님을 설명하기 위해 이런 비유, 저런 비유를 들이대보지만 늘 뭔가 어색합니다. 적절하지 않습니다. 때로 억지로 끼워 맞추는 무리한 비유에 스스로 민망스럽기도 합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 대해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일반인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관상 수도원, 봉쇄 수녀원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수도원이나 신학교, 사제관에서도 일정 영역에 대한 어느 정도의 존중을 요구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 속성상 수도원, 수녀원은 어느 정도 세상과의 거리가 필요합니다. 어느 정도 베일에 싸여있을 필요도 있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별것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의 고유한 영역, 어느 정도의 신비감을 지닐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공개되는 이 시대 수도원, 수녀원만큼은 미지의 영역, 미개척지로 남아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낱낱이 다 공개되고, 모든 것이 다 알려지고, 모든 것이 다 개방되면 결국 어쩔 수 없는 속화의 길을 걷게 되고, 또 다른 측면에서의 실망감, 상실감만이 남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 매력적인 이유는 다른 무엇에 앞서 신비스럽기 때문입니다. 알다가도 모를 하느님이기에 우리는 그분께 매력을 느낍니다. 그분에게 파고듭니다. 알 수 없는 하느님, 아무리 기를 써도 서술이 불가능한 하느님이기에, 도무지 필설로 설명이 안 되는 하느님이기에 지속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우리 인간의 지각능력으로 모두 다 밝혀진다면, 그래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명명백백히 밝혀진다면, 하느님의 개념이 인간의 머리로 완전히 포착된다면, 다들 신앙을 떠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삼위일체의 하느님에 대해서 설명해보고자 합니다.


   한국 야구 대표 팀이 끗발을 날릴 때 생각했던 것입니다. 야구시합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승패에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은 아무래도 팀의 감독입니다. 아무리 보석 같은 선수들이 즐비하다 할지라도, 아무리 고액연봉의 화려한 선수들을 많이 소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감독이 수비 포지션 구성을 잘못한다거나 타순을 엉망으로 짠다면, 혹은 작전지시를 잘못한다면 그 팀의 성적표는 초라할 것입니다.


    감독 못지않게 팀 승리에 크게 공헌하는 중요 인물이 있는데 바로 그날의 선발투수입니다. 선발투수의 어깨가, 그의 컨디션이 그날 팀 승리의 7할을 좌지우지한다고 말합니다. 선발투수가 경기 초반에 연속안타나 홈런을 두들겨 맞는다든지, 와르르 무너지고 나면 그날의 경기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래서 선발 로테이션에 들어가는 투수들은 대우도 극진합니다. 에이스 투수 같은 경우 특별한 예우를 갖춥니다. 감독도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팀의 승리를 위해 또 한사람 중요한 인물이 있습니다. 팀이 따놓은 점수를 끝까지 지키는 마무리 투수입니다. 아무리 선발투수가 상대 타선을 꽁꽁 묶어놓았다 하더라고 마무리 투수가 죽을 쑤고 나면 바로 역전패로 이어집니다.


    팀 승리를 위한 이러한 역할 분담은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서도 잘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부께서는 인류구원사업을 총괄하시는 감독이십니다. 그분께서는 태초부터 계시는 인류의 창조주, 유일무이한 참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인간들을 향한 극진한 부성애로 똘똘 뭉쳐진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인류구원사업의 감독이신 성부께서 우리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당신의 분신인, 어쩌면 당신 자체이신 아들 예수님을 인류구원을 위한 선발투수로 마운드에 올려 보내셨습니다.


    인류구원사업을 위한 선발투수로 이 땅에 오셔서 훌륭하게 자신의 임무를 완수한 예수님께서는 우레와 같은 관중들의 박수와 환호를 받으며 감독이신 성부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고, 마침내 성부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러자 감독이신 성부께서는 당신의 인류구원사업을 깔끔하게 마무리 짓기 위해 마무리 투수로 협조자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삼위로 존재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인간에 대한 극진한 사랑 때문이 아닐까요? 언제나 방황하고 늘 흔들리는 나약한 우리 인간이기에, 삼위께서는 각자의 역할을 통해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때로 관대하고 대자대비하신 아버지의 모습으로 다가오십니다. 때로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한 어머니의 모습으로도 다가오십니다. 때로 감미로운 바람처럼, 때로 장엄한 석양처럼, 때로 향기로운 꽃처럼 그렇게 다가오십니다. 협조자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실 때 그 모든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어디로 가야할 줄 몰라 우왕좌왕하는 우리에게 나아갈 방향을 정확하게 잡아주시는 이정표이십니다.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보다 가치 있고, 무엇이 보다 우선적인 것인지를 식별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죄인인 우리와 죄인들의 모임인 교회의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신선한 바람이신 분, 그 바람으로 공동체를 일치시키시고 쇄신시키는 분이십니다.


    참된 일치는 성삼위께서 보여주신 모범처럼 자기 낮춤을 전제로 시작 됩니다. 자기 본위의 삶을 탈피한 이타적인 삶, 쉬지 않고 밑으로 내려가는 삶, 마음 크게 먹고 크게 한번 물러나는 삶을 통해 너와 나의 일치는 시작됩니다. 명예나 권세는 그것을 쫓는 사람들에게 맡기고 구름처럼 바람처럼 이 세상 그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때 요원했던 일치는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집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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