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하늘나라, '하느님의 다스림' 선포 [사랑의 정의]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09-06-10 조회수401 추천수3 반대(0) 신고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하늘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

<요한복음서 - 마태오복음서 - 루카복음서>

...........................................................................................................................

오리게네스는 "영혼이 죄 때문에 상처를 입고 더럽혀지기 때문에 깨끗해지기 위해서는 말씀이 필요합니다. 영혼을 더럽히는 죄들이 있는데 이 죄들을 위해서 말씀의 잿물, 말씀의 비누가 필요합니다." (예례미야서 강해 2, 2)

암브로시우스는 "설교(말씀)는 영혼의 상처를 싸매는 붕대입니다. 완고한 마음을 가볍게 할 수 있는 설교(말씀)라는 기름을 사용하십시오. 붕대를 감아 나쁜 길로 들어서서 헤매이지 않도록 하십시오." (서간집 15, 7)

...........................................................................................................................

 

하느님의 구원행동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실천 안에서 이루어진다. 케쓸러는 "예수님은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면서 자신의 전 존재(말씀)와 활동(행적)을 통해서 자애로우신 하느님을 현존케 하는데에 전념하였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치유하고, 일으켜 세우는 하느님을 체험하게 되었다. 하느님을 이렇게 체험하고 그 결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구원이다."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와 실천은 '여기저기서 인간 행동과 능력, 자력 의화 안에 갇혀 있다'고 할 수 있는 이들을 만났는데 이들(율법주의자)은 예수의 하느님을 의문시하였다.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부류의 분쟁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안겨 주었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의 하늘 나라 선포와 실천을 의문에 처하게 했지만 부활을 통해서 극적인 반전이 이루어진다. "예수 부활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실천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난 사건이며 그를 믿고, 그의 복음(아버지의 말씀)에 몸 바치며 그의 십자가 삶을 기준으로 삼으라는 부르심이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 자체에만 의미를 두는 전통적인 구원론과 구별된다. 예수님의 삶과 활동에로 초점을 두면서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소식(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가운데 구원과 해방을 선사하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구원관은 전통적인 구원관과 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라이문트 슈바거는 이런 문제를 분명하게 의식하고서는 두가지 구원론의 조화를 시도한다. 그는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를 온전히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전통적인 '십자가 중심의 구원론'을 결코 축소하지 않는 길을 모색하였다.

제1막 :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의 중심은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의 다스림'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죄인들과 세리들을 사랑으로 만나고 용서하시고 그들이 회개하기도 전에 먼저 구원을 제시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다는 것이다. 이는 구원과 회개의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회개가 용서보다 선행하는 것이지만 이제는 은총(용서)에서 회개가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전제조건은 없지만 뒤따르는 조건은 있다.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다가 왔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마르코 1, 5) -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의 다스림의 선포는 곧바로 회개의 요구로 이어진다. 이 회개의 기본적인 형태는 아버지께로 완전히 돌아서는 것인데 이는 산상수훈에서 드러난다.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완전해야 합니다"(마태오 5, 48)

슈바거에 따르면, 회개는 예수님의 '하느님의 다스림' 선포가 지향하는 종말의 하느님 백성의 형성에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것이다. "인간들이 산상수훈(행복선언)에서 요구하는 바대로 행동한다면(죽은 행동이 아닌, 살아있는 행동) 새로운 백성은 실제로 존재하게 된다."

하느님의 다스림이 단지 일방적인 용서와 무조건적인 구원의 제안으로 끝나지 않고 인간의 회개와 응답의 요구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는 이스라엘의 지배층(세상 권력자)로부터 심각한 반대를 받았으며 마침내는 거부되었다. 바로 이것이 예수의 구원 드라마 2막을 이룬다.  

 

 

제2막 :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다스림'의 선포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의지를 받아들여 회개해야 했지만 거부하고 말았다. 이 거절로 인해 새로운 상황이 형성되었다. 계시를 받아들여야 할 사람들이 거부하였고, 이 거부의 상황에서 예수는 심판의 말씀으로 응답하였다. 이는 예수님의 감정적 대응이 아니라 '제안을 거부한 것에 대한 귀결을 보여주는 것'이다.

달리말하면 예수가 선포한 심판은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심판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스스로를 (죄의 힘 안에) 가두어 두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다스림을 거부하는 것은 자신이 정한 척도에 따라 스스로를 심판(자기 심판)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같 어둠 속'(마태오 25, 30)으로 쫓겨난다.

 

 

제3막 : 심판을 선포하신 예수 자신이 심판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는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 의연하게 대처하였다. 악이 배가(倍加)되는 것에 대해 아무런 저항도 없이 수용할 자세를 갖출 정도까지 자신의 사랑을 고양(高揚)시키는 것으로 대답하였다. 

하늘의 아버지께 용서를 얻기 위한 보상의 실천이 아니라,  '아버지의 다스림'을 거부하는 이들을 대신해서 속죄한 행동이었다. 반대자들의 공격에 대해 이 요구를 스스로 실천한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의 하느님으로 이해하고 인간은 하느님의 이런 완전성을 닮아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홀로 '하느님의 다스림'(사랑의 정의)을 실현한 것이다.

 

<제4막과 5막은 다음 기회에>  * 분홍색 = 게시자 *

 

 

세상 권력이 예수님을 지배하려고 했지만
 
세상의 권력자가 참으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요한복음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행복의 첫째 조건 (산상수훈) = 정치경제적 측면에서의 세상 구조적인 모순에 의해서 발생하는 그런 '가난한 약자'가 행복하다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과부' (비록 가진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자신을 내어 주는 참된 가난한 자, 참 민중)에서 처럼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 그 정의를 어린 양들에게 주신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마태오복음서 6, 25 - 34> 

"내 어린 양떼들아, 조금도 무서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하늘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  <루카복음서 12, 32>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요한복음서 18, 36>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