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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과 전멸(헤렘) 규정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9-06-16 조회수513 추천수5 반대(0) 신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과 전멸(헤렘) 규정 - 윤경재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43-48)

 

  교회사를 읽다보면 초세기에 구약성경을 교회에서 받아들일 것인지 퇴출시킬 것인지 논란이 된 적이 있습니다. 구약을 퇴출하여야 한다는 의견을 낸 대표적 인물이 마르치온입니다. 그가 내세운 논리는 이렇습니다. 신약의 하느님이신 예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으며 그 정도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데까지 이르렀지만, 구약의 하느님께서는 원수를 징벌하시는 분이시며, 만군의 야훼이시며, 가나안 정복 전쟁 때에 상대방을 하나도 남김없이 죽이라고 명령하셨다는 근거를 들었습니다. 신약의 하느님은 자비의 하느님이신데 반해 구약의 하느님께서는 몰인정한 폭력을 함부로 휘두르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가르침과 전혀 다른 구약을 배제하여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교부들은 마르치온의 주장을 이단이라고 규정하고 구약성경을 교회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최종 결의하였습니다. 또 신약성경 27권을 정경으로 확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이들이 구약에서 말하는 전멸 정신을 이해할 수 없는 조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면 처음부터 없었던 규정인양 모르는 채 침묵으로 어물쩍 넘어가기도 했습니다.

  전멸 규정을 히브리어로는 ‘헤렘’이라고 부릅니다. 신명기 13장에 그 내용이 자세하게 나옵니다. “너희는 반드시 그 성읍 주민들을 칼로 쳐 죽이고, 성읍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과 가축까지 칼로 전멸시켜야 한다.”(신명13,16) “너희는 그 완전 봉헌물 가운데에서 아무것도 손을 대어서는 안 된다. 그래야 주님께서 당신의 진노를 푸시고 너희를 가엾이 여기시며, 너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너희를 가여워하시며 너희를 번성하게 해 주실 것이다.”(신명13,18)

  새 성경에서는 ‘헤렘’이라는 단어를 동사로는 ‘전멸하다.’로 번역하고 명사로 쓰일 때는 ‘완전 봉헌물’로 번역하였습니다. 헤렘 규정이 적용된 첫 사례는 여호수아 6장에서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 예리코를 점령할 때 이스라엘은 색다른 경험을 합니다. 여호수아 6장을 세심하게 읽어보면 이스라엘 군대는 실제로 전쟁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한 일이라고는 7일간 예리코 성 주위를 돌았을 뿐입니다. 그것도 침묵하며 돌았습니다. 이렛날에는 뿔 나팔을 부는 가운데 성 주위를 일곱 바퀴 돈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계약 궤를 메고 돌면서 이렛날에 크게 함성을 지르자 성벽이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쉽게 예리코 성읍을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진영에게 단단히 이릅니다. “성읍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주님을 위한 완전 봉헌물이다. 다만 창녀 라합과 그 여자와 함께 집에 있는 사람은 모두 살려 주어라. 그 여자는 우리가 보낸 심부름꾼들을 숨겨 주었다. 너희는 완전 봉헌물에 손을 대지 않도록 단단히 조심하여라. 탐을 내어 완전 봉헌물을 차지해서 이스라엘 진영까지 완전 봉헌물로 만들어 불행에 빠뜨리는 일이 없게 하여라.”(6,17-18)

  바로 헤렘 정신이 어디서 출발하는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가나안 정복 첫 번째 전쟁은 인간이 이룩한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야훼 하느님께서 직접 나서셔 이루신 승리였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이루신 전쟁에서 거둔 노획물은 인간이 차지해서는 안 되며 전부 주님께 봉헌해야 마땅하다는 정신이었습니다. 만약에 인간이 욕심을 부려 그 봉헌물에 손을 댄다면 그도 그 봉헌물과 같은 처지가 되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경고였습니다. 창녀 라합은 주님의 길을 따랐으므로 살려두는 것이 마땅하며 은과 금, 청동 기물과 철 기물은 모두 주님께 성별된 것이므로, 주님의 창고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고였습니다.

  마침 그 명령을 어긴 사례가 발생했습니다. 그 다음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뜻밖의 패배를 당하는데 그 이유가 유다지파의 아칸이라는 작자가 완전 봉헌물에 손을 대어 자기 천막에 두었던 것입니다. 그 사실이 밝혀지고 온 백성이 나서서 아칸 가족을 돌로 쳐 죽이고 봉헌물을 불사르고 나서야 아이 성을 함락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헤렘 규정은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의미이지 잔악하게 몰살시킨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 후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인간적인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는 그 규정이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정신을 두고 신명기 저자들은 야훼하느님 숭배 정신이 가나안 토착 신앙인 바알 숭배와 혼합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신명기에 적어놓은 것입니다.

  사무엘 상권 15장에서 헤렘에 관한 이런 예가 또 나옵니다. 사울 왕이 아말렉과 전쟁을 치를 때 만군의 주님께서 분명히 그 전쟁의 의미를 주님의 전쟁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럼에도 사울은 자기가 잘나서 승리한 것으로 착각하고 자기 임의대로 완전 봉헌물 규정을 어겼습니다. “사울과 그의 군사들은 아각뿐 아니라, 양과 소와 기름진 짐승들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것들과 새끼 양들, 그 밖에 좋은 것들은 모두 아깝게 여겨 완전히 없애 버리지 않고, 쓸모없고 값없는 것들만 없애 버렸다.”(1사무엘15,9) 이에 주님께서는 사울을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가서 주님의 규정을 어긴 이유를 묻자 그는 거짓말로 변명을 합니다.

  이 때 사무엘은 사울을 꾸짖으며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15,22)라고 말합니다.

  헤렘 규정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 확실하게 정의하는 구절입니다. 헤렘 규정은 주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대로 따르라는 정신을 밝힌 것입니다. 아직도 헤렘 규정을 들어 구약의 하느님을 오해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또 다른 마르치온 추종자가 될 뿐입니다. 교회는 그들을 이단이라고 선언하고 분명히 축출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솔로몬 왕은 헤렘 규정을 제일 심하게 어긴 왕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도성 안에다 이방 잡신의 신당을 꾸미고 이방 여인들과 혼인하였으며 삼천 궁녀를 거느린 전제 왕이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 백성을 도탄에 빠트리고 삯꾼으로, 농노로 전락하게 만든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역사서 저자들은 그들의 조상인 솔로몬 왕의 잘못을 낱낱이 적어 놓았습니다. 지나간 역사적 오류를 반성하고 후손을 징계하는 의미가 담겼습니다.

 우리도 헤렘 규정을 받아들이기 곤란하다고 비난하기 전에, 왜 구약 성경에서 그렇게 헤렘을 강조했는지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재해석하는 지혜를 보여야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원수를 사랑하여라.”라고 하신 말씀에는 구약의 하느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오해를 풀고자 하시는 뜻도 담겨있습니다. 주님께서 아빠 하느님이라고 부르신 분을 옹졸하신 분으로, 저주나 내리시는 분으로 여긴다면 잘못되었다는 지적입니다. 아빠 하느님께서는 진정 용서의 하느님, 자비의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이시니 우리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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