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6월 21일 야곱의 우물-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9-06-21 조회수427 추천수3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사람이 죄를 지은 형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하시기 전에, 예수님은 믿는 이들 개개인에 대한 하느님의 무한한 관심을 일러주십니다(마태 18, 10 - 14). 개인은 언제나 하느님 앞에 있으며, 아무도 하느님의 눈길에서 잊혀지지 않고, 어느 누구에게도 하느님의 사랑과 굽어보심은 사라지지 않는다고요. 그다음 개인적인 잘못이 전체 공동체의 생활과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15 - 18절).
이는 또 개개인의 행위를 넘어 교회의 공적인 행함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의미는 이어지는 다음 구절에서 더욱 강조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19절)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마음을 모아 함께 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개인 기도가 힘이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함께 바치는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형제들과 함께 공동으로 바치는 기도의 힘에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형제들이 마음을 모아 바칠 수 있는 기도라면 ‘무슨 일이든’ 하느님께서 다 들어주신다고 하십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그 이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20절) 이런 모임과 공동체의 존재 이유는 바로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그분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말은, 곧 그분이 누구인지를 잘 알고 있으며, 그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모인다는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모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그 중심에 모시고 있습니다.
유서 깊은 유다 라삐 전승의 하나인 「선조들의 어록」에는 옛 하느님 백성의 율법에 대한 이와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같이 앉아 율법(토라)의 말씀을 연구할 때 ‘쉐키나’ (하느님의 현존)가 그들 가운데 있다.” 하느님의 뜻이 담겨 있는 율법의 말씀이 공동으로 묵상되고 있는 그곳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여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의 제자들 가운데 현존하여 계시는 분은 부활하신 주님 그분이십니다. “하느님의 모상” (콜로1, 15)이며 아버지의 뜻에 따라 오시어 하느님의 완전한 뜻을 선포하셨고, “우리 가운데 사셨던” (요한 1, 14) 예수님은 진정한 의미에서 ‘쉐키나’, 지상에서 완전하고 참된 하느님의 현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가 주님께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마태 18, 21) 형제들은 그들의 죄에 대해 서로 용서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이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그는 묻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제시한 ‘일곱 번’이라는 말은 다음에 나오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는 말과 같이 상징적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하고 최종적인 어떤 것을 가리키니까요.
베드로의 ‘일곱 번’ 은 용서의 의무가 분명하게 요구하는 한 번보다도 더 자주 기꺼이 용서를 베풀려고 했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기꺼이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하십니다.(22절) 이는 결국 한없이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심으로써 보통 사람의 ‘이치에 맞는 납득할 만한’ 기준을 뒤집어엎으십니다. 여기에는 잘못을 범한자가 회개하거나 최소한 묵시적으로라도 용서를 구할 경우라는 단서조차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원칙’ 은 놀랍고 충격적인 것이라 사실 받아들이기 가 쉽지 않습니다.

잠시 성경의 다른 이야기를 떠올려 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것과 같은 숫자가 반복되어 나오는 성경 본문이 하나 있습니다. 카인의 후손 라멕이 아내들에게 들려준 노래입니다. “나는 내 상처 하나에 사람 하나를, 내 생채기 하나에 아이 하나를 죽였다. 카인을 해친 자가 일곱 갑절로 앙갚음을 받는다면 라멕을 해친 자는 일흔일곱 갑절로 앙갚음을 받는다.”(창세 4, 23 - 24)
아우 아벨을 죽인 후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된 카인은 하느님께 청하여 특별한 보호를 받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카인을 만나는 어떤 사람도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표를 주신 것입니다.(창세 4, 15) 만일 그가 죽임을 당한다면 그의 죽음은 일곱 갑절로, 곧 완전하게 되갚음을 당할 것입니다.

카인의 이야기를 통해 아무리 나쁜 죄를 저지른 죄인일지라도 하느님께서 보호하시는 영역 안에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라멕은 자기를 해치는 사람에게 카인보다 더 무자비한 보복을 가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두 경우에서 다른 점은 카인의 죄와 카인에게 죄를 저지르는 사람의 죄에 대한 처벌은 모두 하느님의 권한 안에 들어가 있지만, 라멕은 스스로 자신의 보복 권한을 주장한 것이지요. 이처럼 라멕이 주장하고 있는 것과 같은 무절제한 보복행위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끝없이 순환되는 복수와 폭력의 사슬에 반하여 예수님께서는 무한한 용서의 형제애를 대응시키십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확대된 죄는 그에 대등한 무한한 선에 의해서만 저지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나칠 정도로 용서해야 될 이유일 것입니다. 그래서 매정한 종의 비유가 베드로에게 주는 대답의 마지막을 완성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마태 18, 33. 35)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 21)
강선남(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 박사과정)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