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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181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6-24 조회수427 추천수2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아기 이름은 요한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7-66.80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80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인 이사야서의 의하면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복음에서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께서 예비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를 우리의 고유 정서로 이해하면 하늘이 점지해 주셨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처럼 예언서에서 말씀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루카 복음사가는 오늘 복음을 복음서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인 이사야서 말씀이 세례 요한에 대한 성경의 예언이라면 제1독서의 마지막 말씀인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에 대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에서 민족들의 빛이신 분은 예수님 한분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위대함을 알리기 위해서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복음서에 기록하고 있지만 큰일을 하실 분은 하느님이 점지해 주신다는 우리의 고유 정서로 오늘 복음을 이해하고 묵상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하였습니다. 이처럼 민중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광야에서 수행하며 그 자질을 갖춰야 하지만 자질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고 있으므로 바람 잘 날이 없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권력을 주지 마라는 뜻에서 어제 말씀인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고 하신 말씀으로 새롭게 묵상되고 있습니다.  

속세를 떠나 수행을 하려면 우리나라는 지형이 산악지대이기 때문에 대부분 산속으로 들어가지만 이스라엘 지역은 사막지대이므로 사막으로 갔을 것입니다. 우리의 산속은 시원하고 풍요롭기나 하지만 광야인 시나이반도의 사막은 땡볕에 먹을 것도 구하기 힘든 상황이므로 메뚜기와 꿀을 먹으며 거의 단식에 가까울 정도의 고된 수행을 하였을 것입니다.
 
광야는 수행의 장소이며 삶의 터전은 아닙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뜻을 깨달았으면 다시 삶의 터전인 속세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처럼 다시 돌아온다는 뜻에서 불교 용어로는 이를 회향(回向)이라 합니다. 요즘은 어떤 일이 끝났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지난 임진각에서 오체투지 순례를 마치고 가진 행사를 회향식이라 명명한 것은 이런 뜻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신앙생활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이 광야의 삶을 청산하고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나신 것처럼 예수님 또한 광야에서 갈릴래아로 돌아오신 것처럼 민중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신앙이 필요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俗을 위해서 聖이 있는 것이며 聖 아래에 俗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 때문에 집안에 불화가 있다면 당연히 집안의 평화가 우선되어야 할 것입니다.
 
전에는 聖이 俗의 상위개념이었다면 이제는 聖은 俗을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는 관점으로 변화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과도기적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므로 聖과 俗, 이중에서 어디에 더 중점을 둘 것인가에 대하여 서로 관점이 다르므로 충돌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종교인은 종교인답게 기도생활에만 열중하라는 분도 계시고 다른 일부에서는 현실에 침묵하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聖과 俗으로 구별했던 종교뿐만 아니라 민주, 시민사회로 발전하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들어나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국민을 위해서 집권자가 필요한 것이지 집권자를 위해서 국민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집권자는 국민의 소리를 들으라고 연일 아우성이지만 아직도 제왕적 생각을 가진 집권자는 오히려 국민들에게 나를 따르라며 전혀 소통을 하지 않고 있으므로 많은 저항을 받고 있습니다. 이처럼 과거의 가치관은 모두 도전받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으므로 우리 신앙도 전통만을 자랑하며 이를 고수한다면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므로 갈수록 교회를 찾는 발걸음은 줄어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묵상이 샛길로 빠진 것 같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가장 큰 업적은 세례라는 엄청난 대 변혁을 주도한 사실입니다. 민중들은 죄 사함을 받기위해서는 하느님께 번제물이나 희생제물을 바쳐야 했으나 세례를 통해서도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선포하며 세례를 주었으므로 그 파장은 대단했을 것입니다. 특히 비둘기 한 쌍도 제물로 바칠 여력이 없는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에게는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었을 것입니다.
  
세례를 통한 죄 사함이 육신의 죄를 사하여 주는 것에 머물고 있었다면 우리의 영혼이 죄를 짓는 행위에 대하여는 죄 사함을 할 수 없으며 또, 세례 이후에 또다시 죄를 짓는 경우에는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하므로 예수님께서 이를 보완한 것이 성령의 세례이며, 성령의 세례는 복음을 실천해야 가능하므로 성령의 세례를 주시기 위해서 복음을 선포하신 것으로도 설명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두 번째 업적은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마르 6,18)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아무리 절대자라 할지라도 틀린 것은 틀린 것이므로 바른 소리를 하라는 자각을 심어주었습니다. 우리가 율법의 노예가 되면 모든 것을 율법으로만 판단하므로 이런 자각이 생겨날 여지가 없습니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차지하는 것은 부활 논쟁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율법으로 그렇게 되어있는 것 같습니다.
 
이는 생활 능력이 없는 혼자된 형수를 보호하는 차원으로 이해하고 있으므로 동생이 먼저 죽으면 형이 그 아내를 차지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므로 율법에는 저촉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만약, 율법에 저촉되지 않았음에도 이런 말씀을 하셨다면 유산이 있어 생활 능력이 있는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율법의 정신에 어긋나므로 예수님보다 앞서 획일적으로 적용하는 율법의 폐단을 지적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보다 앞서 오셔서 당시로서는 그 누구도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엄청난 깨달음을 얻으시고 이를 실천에 옮긴 세례자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며'(요한 3.28)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신 예언서의 말씀을 수행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한없이 낮추셨습니다. 앞서가는 사람이 없다면 뒤 따라가는 사람도 없습니다. 선답자가 있기에 그 뒤를 따르는 후답자가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선각자는 다음 세대의 선답자가 되듯이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선답자가 되었으며, 또 세례자 요한보다 앞서 그 길을 간 사람들은 많은 예언자들 입니다.
 
이처럼 인류의 역사는 면면이 이어온 이런 선각자들이 계셨기에 오늘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을 맞이하며 이런 예언자 전통을 중시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한 축이라는 사실을, 또한 이런 예언자들은 모두가 박해를 받았기에 지금 박해받고 있는 많은 분들이 이 시대의 예언자임을 기억하며 오늘 묵상을 마칩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은 박해를 받아 승천하였으며
세례자 요한은 앞서 그 길을 가셨습니다.
죄 사함을 받고자 하여도 제물을 바칠 수 없어서 늘 죄인으로 살아야 하는
불쌍한 민중들에게 세례자 요한은 세례의 큰 은총을 주셨습니다.
저희도 이처럼 고통 받고 살아가고 있는 이웃들에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의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기를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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