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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님의 권위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9-06-25 조회수436 추천수4 반대(0) 신고
 
 

예수님의 권위 - 윤경재

 

“예수님께서 이 말씀들을 마치시자 군중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자기들의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태7,28-29)

 

 마태오복음 5-7장 산상수훈의 내용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롭고 놀라운 가르침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놀라움의 표현은 비단 백성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에게도 엄청난 경이로 다가왔습니다. 마르코와 마태오 복음서 저자는 이런 경이감의 근거를 ‘권위’라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마르1,27)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권위라는 그리스 단어의 뉘앙스를 살펴보면 왜 그들이 예수님을 특별한 분으로, 새로운 스승으로 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권위로 해석한 ‘exousia’ 를 파자하면 ‘~로부터’ 라는 뜻의 전치사 ‘ex’와 존재를 뜻하는 ‘ousia’가 합하여 나온 여성형 명사입니다. 그 의미는 ‘전 존재로부터 나온 어떤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저 어떤 자격이나 명칭에서 나온 능력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율법학자는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일정 기간 수업을 받고 그 스승의 허락에 따라 율법학자가 되었습니다. 정치가의 권력도 그가 어떤 직위나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에 힘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나 권력자나 그의 인격이 훌륭해서 권위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내세우는 힘은 비유하자면 겉에 두른 겉옷이나 완장을 차고 모자를 썼기 때문에 나오는 강제력일 뿐입니다. 그의 힘에 항거하면 피해를 볼 것 같아서 마지못해 따르는 모양새입니다. 마음속으로 우러나오는 자발적 동의를 수반하지 않고 겉으로만 쫓아가는 억제력입니다. 그들의 강한 힘에 눌려 마지못해 따르지만 속으로는 거부하고 싶은 충동이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위는 아주 달랐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이 비록 이해하기 어렵고 따르기 곤란하다는 느낌이 왔지만, 왠지 그렇게 살아야 옳을 것이라는 믿음을 주었습니다. 내가 실천하기 어렵겠지만 따라야 하겠다는 생각은 전인적인 동의에서 나오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강제로 시켜서 나오는 생각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존재에서 나온 언행이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존재를 움직였기 때문에 그들이 권위를 느끼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께서 주시는 가르침을 두고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마르틴 루터와 같은 이는 ‘이행 불능설’을 주장하였습니다. 산상수훈은 인간이라면 누구도 실천할 수 없는 요청인데, 자신들이 실천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자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해석입니다. 또 노벨 평화상을 타신 앨버트 슈바이처 박사는 이 산상수훈은 종말 때에나 필요한 법으로 평상시에는 그런 정신만 알면 된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임박한 종말을 염두에 두고 ‘잠정적 윤리 규정’을 선포한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산상수훈을 마무리 하면서 든 네 가지 비유말씀은 모두 강력한 실천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좁은 문과 넓은 문’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 ‘최후 심판대에 나설 인간들’ ‘바위위에 집짓기’ 등 모두가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반드시 따라야 할 가르침이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심중을 깨닫기만을 뜻하지 않으셨습니다. 루터와 슈바이처의 주장은 예수님의 심중을 깨달으라는 데에 머무른 것입니다. 그분들의 주장에도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그 시대에 필요한 주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마태오 복음서 저자는 마지막 결론을 내리면서 ‘권위(exousia)’라는 의미심장한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인간 실존을 흔드는 힘이 담겨있습니다. 산상수훈이 막상 겉으로 보기에는 실천 불가능하고 잠정 윤리 규정처럼 보이지만, 예수를 따라 자신의 전 존재를 바꾸는 것에서 출발한다면 전혀 그렇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을 복음으로 받아들이면 실천할 수 있는 힘도 예수님의 권위 덕분에 생겨난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양사언)

물론 인간의 힘만으로 태산에 오른다는 말도 어불성설이겠지만, 태산을 향해 인간의 길 떠남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본래 마태오 저자의 의도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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