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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끌개장이론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9-06-30 조회수643 추천수5 반대(0) 신고
 

끌개장이론 - 윤경재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그분은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그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말하였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태8,24-27)

 

마태오 저자는 5-7장에서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엄청난 말씀을 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모두 이 엄청난 가르침을 어떻게 따를지 난감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열 가지 기적을 보여줌으로써 누구나 예수님의 권위에 따른다면 어렵게만 들리는 산상수훈 내용을 실천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특별히 풍랑을 가라앉히는 예수님의 모습을 목격한 제자들이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라고 고백하여 그 가능성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언행일치하시는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면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50년 전에만 해도 사람이 1마일을 4분 안에 달린다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달리다가는 심장과 허파가 터져 죽을 것이라고 모두 예상했습니다. 1,609미터 경주는 전력질주 할 수 있는 단거리 경기도 아니고 마라톤처럼 장거리 경주도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도 영국의 아마추어 달리기 선수인 로저 배니스터는 1954년 이 엄청난 기록에 도전하여 성공하였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이 魔의 기록을 깨자 한 달 내로 10여 명이 그 기록을 돌파였으며 1년 뒤엔 37명이 2년 뒤엔 200여 명이 그 기록을 넘어섰습니다. 인간의 능력이 갑자기 증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불가능하게만 여기고 도전하지 않았으며 마음으로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는데 누군가 그 기록에 성공하였다는 것에 고무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어떤 한 사람이 나서서 한계를 극복하면 다른 사람들도 그 한계를 쉽게 극복하게 된다는 이론을 ‘끌개장이론’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신기록을 수립한 선수는 그 기록을 경신한 원동력이 자기 혼자만의 힘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관심과 이제껏 알지 못했던 어떤 힘이 자신을 이끌었다는 체험을 고백합니다. 그 순간 무아의 경지를 체험했다고 겸손하게 고백합니다. 자신이 치른 최대의 노력이 장벽을 돌파하게 했지만, 마지막 장벽 돌파는 개인의 힘이 아닌 더 큰 힘에 의해서였다는 것, 그로써 이제껏 알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또 하나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입을 모읍니다. 

자존심이나 욕심을 내세우고 상대방을 이기는 데에 주목적이 있는 경기자는 그 순간부터 근육 반응이 약해지는 체험을 한답니다. 위대한 기록에 필요한 온 힘을 다하는 마음이나 부단한 노력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뛰어남이 개인 성취에 머물었을 때는 저조한 기록을 내었으나, 자신의 명예나 만족을 잊고 인간 잠재력의 성취라는 단계에까지 미쳤을 때 비로소 위대한 기록이 나왔다고 깨달은 것입니다. 깨달음의 경지를 돌파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공체조나 태극권 같은 동양무술의 스승들이 몸과 마음의 일치라는 단계를 강조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사부들이 흔히 말하듯 ‘억지 힘을 쓰려고 하지 마라.’는 화두가 곧 ‘끌개장이론’을 믿고 따르라는 말입니다.  

‘끌개장이론’은 운동 경기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사 모든 범주에서 적용됩니다. 개인적 욕심을 버리고 대상과 하나 되는 체험을 추구할 때 뜻하지 않았던 결과를 낸다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놀라운 체험을 하였고 또 이 이론을 추구하라고 가르칩니다. 처음부터 큰 욕심 내지 말고 아주 작은 변화부터 직접 체험하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이 수련의 과정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산상수훈의 요지는 전대미문의 ‘新 인간’이 되라는 요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냥 맹목적으로 따르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신께서 스스로 ‘끌개 장’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 교회사에는 예수님의 성령을 자신 안에 모시고 살면서 전인격이 변화하여 두 번째, 세 번째 예수가 되신 분들이 많이 탄생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들을 성인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험한 풍랑에 맞닥뜨린 제자들은 주무시는 주님의 손을 빌려서라도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불안감의 표현이었습니다. 우리가 인생살이에서 흔히 느끼는 그런 불안과 두려움입니다. 주님의 구원을 믿고 공손히 받아들이는 경지에 다다른 것이 아닙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라는 꾸짖음은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부족한지, ‘신뢰에 가득 찬 기도가 아니라 불안에 휩싸인 기도’이었는지 깨우치라는 말씀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어떤 분으로 남고 싶으신지 가르치십니다. 호수와 바람이 피조물이듯, 인간도 하느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입니다. 간혹 호수와 바람이 세찬 격랑에 휩싸이듯 우리도 격랑에 휩싸일 수 있으며 인간 존재를 뒤엎어버리는 위기에 닥칠 수 있습니다. 그런 때라도 주님의 말씀 한마디면 모든 것이 질서를 회복한다는 진리를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지 않고 그 누구를 따를 것인지 분명히 결정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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