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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193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12 조회수381 추천수2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연중 제15주일]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7-13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7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8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9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10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11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12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13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수님이 사도들을 파견하시며 사도들에게 부여한 권한은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가 전부이므로 우리 교회의 가르침도 우리의 영혼을 깨끗이 치료해 주는데 있으며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영혼이 깨끗하지 못한 자는 자비도 사랑도 실천하지 못할 것이므로 깨끗한 영혼과 자비의 실천은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를 이루고 있으므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깨끗이 치료하는 것은 우리의 심성을 원래 상태로 회복시켜 주는 일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눈처럼 희고 아주 순박한 것이지만 온갖 탐욕으로 더렵혀져 있으므로 이런 탐욕을 없애주는 일을 우리 교회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이런 사명을 망각하고 하느님을 빙자하여, 하느님의 이름으로 오히려 민중들을 괴롭히고 있었으며 괴롭히는 수단의 하나로 모든 민중들에게 죄인이라는 의식을 심어주었고, 죄에 대한 사면권을 하느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유대교 지도자가 가지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그들은 민중들 위에 군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의 이런 행위는 잘못된 것이므로 예수님은 우리가 용서하고자 하면 용서받지 못할 그 어떤 죄도 없으며 신성을 악용하고 있으므로 오죽하였으면 신성을 모독하는 일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인 당신의 가르침을 기억하도록 알려주는 성령을 모독하는 행위만큼은 용서받을 수 없다(마태 12, 31. 마르 3, 30)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을 실천하는 제자들은 기득권 세력인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당연히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으므로 "나 때문에, 내 이름 때문에" 박해를 받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그리스도교가 이런 죄인 의식을 심어주는 유대교 잔재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아직까지도 죄인이라는 이런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신앙생활을 하게끔 하고, 저희들 역시 이런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우리 교회의 존재 이유이고 오늘 복음인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하신 이 말씀에 함축된 소중한 가르침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씀이 되고 말 것입니다. 묵상의 편의 때문에 유대교 잔재라고 표현하였지만 유대교를 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므로 당시 유대교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민중들을 속이고 군림하였던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문제가 있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까지 잘못한 죄가 있다면, 잘못 생각한 것들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회개하여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를 알리기 위해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더러운 영에 대한 권한"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죄를 없애주는 권한을 마치 교회가 가지고 있는 것처럼 면죄부인지 면벌부인지를 팔아서 바티칸 대성당을 지었고, 지금도 일부에서는 이런 유사한 행위를 여전히 하고 있으므로 이런 행위들이 바로 결코 용서받지 못할 성령을 모독하는 행위가 아닌가 하는 묵상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아니 저희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당시는 사회가 불안한 사회였기 때문에 제자들의 안위가 염려되어 둘씩 짝지어 보냈을 것입니다. 또 안위를 걱정한 말씀으로는 마태오 및 루카 복음서와는 다르게 오늘 복음에서는 지팡이는 가지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장거리 산행의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스틱의 중요성에 대하여는 무릎을 보호하는 안전장비의 하나라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실 것이며 무거운 지게를 지어본 사람도 지팡이의 역할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권위의 상징으로 느껴지는 것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더 나아가 생각하면 둘이 하나가되어 합심하라는 뜻으로 묵상하고 있으며 루카 복음서에서도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시며 둘씩 짝지어 보냈습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엠마오를 향해 가던 제자도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 이상의 증언이 있어야 유효하다는 이런 관점에서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민중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진리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두 사람 이상의 증언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마을에서 환대를 받게 되는 경우에는, 마을 주민들은 제자들을 서로 자기 집으로 모셔가려고 할 것입니다. 이럴 때에는 마을 주민들이 서로 경쟁을 하게 되므로 주민들 사이에 반목이 생길 수 있으므로 오히려 마을의 평화를 깨뜨릴 수 있습니다. 지금도 능력 있는 직원은 경쟁회사에서 스카우트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다 보면 동종 기업 간에 자연히 스카우트 경쟁이 벌어져서 고용질서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런 분란을 없애기 위해서는 처음 숙소를 정한 집에서 다른 집으로 옮기지 말라는 뜻으로, 또 환대하며 잘해주는 사람에게 혹하여 그런 유혹에 빠지지 말라는 말씀으로 묵상하고 있으며,

반대로 그 마을에서 받아드리지 않을 경우에는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하셨습니다. 사실 저는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는데 더 어려움을 느꼈던 이유 중 하나는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이 말씀의 부연 설명으로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하신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태오 복음서에 기록된 이 말씀은 심판을 먼저 떠오르게 하므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하신 이 말씀의 의미를 묵상함에 있어서 그동안은 심판의 관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에서야 다른 관점에서 묵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게 되면 괜히 눈만 더럽혔다고 말하고, 듣지 말아야 할 소리를 듣게 되면 괜히 귀만 더럽혔다며 듣지 않은 것으로 하겠다는 얘기를 하곤 합니다. 또 나쁜 짓을 하는 사람에게 그만 손을 씻으라고 종용하기도 합니다. 나쁜 것을 보고 듣는 것은 우리의 깨끗한 영혼을 더럽혔다는 그런 뜻이므로 이처럼 우리는 잘못된 것에 물들지 말아야 하고 우리의 영혼을 언제나 깨끗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깨끗한 영혼으로 치유되었으나 불의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 들어가면 혹시나 나쁜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 있으므로 정결한 상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발에 뭍은 그 마을의 더러운 먼지까지 깨끗이 청소하라는 말씀으로 묵상하고 있습니다. 이런 묵상을 뒷받침하는 또다른 말씀으로는 벳사이다에서 눈먼 이를 치유하시고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마르 8,28)고 이르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불결한 곳에 있다가 나오게 되면 악취를 없애기 위해서, 더러운 병균에 감염되지 않기 위해서 몸을 깨끗이 씻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영적인 치료를 받아 깨끗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다시 병균에 오염되는 것은 순간이므로 정결한 상태로 끝까지 유지하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많은 사람들로 부터 존경받았던 사람들이 지금은 탐욕에 찌들어, 자리에 연연하여 추한 모습으로 변한 사람들을 우리사회 곳곳에서 자주 목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변절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우리 신앙적 관점에서는 깨끗한 영혼이 악성 바이러스에 감염된 경우일 것입니다.

컴을 백신으로 깨끗이 치료했다고 하더라도 백신프로그램을 실시간으로 감시하도록 설정해 놓지 않으면 컴이 바이러스에 다시 감염되는 것은 순간인 것처럼 우리의 영혼은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컴에 백신을 깔아서 바이러스를 예방하기 위하여 실시간으로 실행시키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기 위해서는 바른 신앙생활을 꾸준히 지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입교 후에 신앙의 선배들을 통해서 느낀 점은 귀감이 되는 깨끗한 영혼을 가진 분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음은 우리 교회의 현주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끝으로 오늘 묵상을 마치겠습니다.    

오늘은 제 손은 물론 발밑에 뭍은 먼지까지 깨끗이 털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사람이 되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며 주님의 성체를 모시겠습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이유에 대하여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하였습니다.
이처럼 병든 우리의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서
오늘은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제자들을 여러 마을에 파견하셨습니다.
저희 교회도 복음 말씀의 바른 가르침으로 병든 저희 영혼을 치유해 주시고
주님께서 부여하지 않은 다른 권한을 부여받은 것처럼 착각하는 일이 없도록
오직 부여하신 임무에만 충실하도록,
부디, 저희 교회와 저희에게 바른 가르침을 기억하여 알려주시는 성령님을 보내주시어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 되지 않도록 지켜주시옵소서!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을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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