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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축복의 교류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14 조회수400 추천수3 반대(0) 신고
 
 

축복의 교류 - 윤경재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마태11,20-24)

 

며칠 전에 새로 사제가 되신 새 신부님 세 분이 오셔서 평일 미사를 집전하셨습니다. 첫 미사를 집전하는 새 사제께 안수를 받으면 은총이 매우 크다는 소문 탓인지 주일 미사에 버금갈 정도로 많은 교우분이 참례하셨습니다. 새 사제들의 가족과 친지를 모시고 평소보다 더 진지하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치렀습니다. 새 사제들 동작 하나하나에 관심을 두고 관찰하는 우리는 모두 한 가족이 된 양 대견함을 느꼈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떠나보내는 부모의 아쉬움도 함께 느끼며 미사에 집중하였습니다. 

미사가 종료되고 다들 안수를 받으러 줄을 길게 늘어섰습니다. 새 사제들께서 얼마나 진지하게 안수를 주던지 길게 늘어선 줄은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보이질 않았습니다. 다들 마음속으로 자신이 받을 축복의 크기를 가늠하고 있었겠죠. 병 낫기를 바라는 사람,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하는 사람, 부자 되기를 바라는 사람, 하느님을 좀 더 알기를 바라는 사람, 가족의 행복과 소원하는 일이 성취되기를 기도하는 사람, 어쩌면 이웃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까지 모두 한 줄로 늘어섰습니다. 창세기에서 아버지 이사악의 축복을 받으려고 애를 썼던 야곱의 심정을 알 것도 같았습니다.

긴 줄 탓에 안수에 집중하시는 신부님들 표정이 점차 지치는 듯했습니다. 기를 빼앗겼다고나 할까요. 뒷줄에 서 있던 저는 이런 기도, 저런 기도를 떠올리며 시간을 메웠습니다. 하다못해 평소에 잘 안 하던 못난 정치인들을 위한 기도까지 빌었습니다. 그러다가 지쳐하는 사제를 보니 퍼뜩 안수가 반드시 한쪽으로 흘러야 하는지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안수 받는 사람이 안수 주는 분에게 마음속으로라도 축복을 빌어주면 안 되나 하는 생각에 미쳤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새 사제께 축복을 빌어보리라 하고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내 머리 위에 얹어진 사제 손의 온기를 느끼며 내 氣를 방사하는 의념을 가득 채웠습니다. 앞으로 새 사제께서 훌륭한 성인 사제가 되시라고 빌어주었습니다. 아니, 지금 당장 기운을 회복하시라고 기를 넣어주고 싶었습니다. 

그 후 어느 말씀의 봉사자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날 참석한 어느 교우분이 힘이 빠진 사제에게 뒤늦게 안수를 받았는데 과연 효과가 충분할지 질문을 하더랍니다. 창세기를 공부하시는 분이셨는데 마침 야곱의 축복 대목을 공부하던 참이었나 봅니다. 

야곱의 형인 에사우는 아버지의 축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붉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았으며, 부모의 뜻을 어기면서 이방 여인을 배우자로 맞아들였습니다. 야곱은 아버지의 축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정당하지 못한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장자권과 이사악의 축복을 받으려 하였습니다. 뒤늦게 사냥에서 돌아온 에사우도 축복을 바랐으나 그는 온전한 축복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사악은 똑같은 축복을 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축복 대신에 에사우는 오히려 동생을 해치려는 앙심만 품게 되었습니다. 

이런 모든 사건의 출발은 어머니 레베카가 꾸민 계략 때문이었습니다. 그녀의 맹목적인 편애가 자칫 두 아들을 한꺼번에 잃게 되고, 상황을 혼란 속에 빠뜨릴 뻔했습니다. 이런 불행한 사태의 결과로 어머니 레베카는 다시는 헤어진 아들 야곱을 만나지 못하고야 말았습니다. 

그분의 질문은 안수의 진정성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새 사제의 첫 안수가 효력이 크다고 한다면 그분이 활기찼을 때 받는 안수가 더 효과적이지 않느냐는 뜻이었습니다. 이런 저런 사정을 재는 것이 옳으냐는 질문이었습니다. 과연 무엇이라고 답을 했어야 옳겠는지요.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도시들은 예수께서 특별히 공을 들여 복음을 선포하던 지역이었습니다. 특히 카파르나움은 예수께서 머물던 베드로의 집과 유대회당이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그 당시 카파르나움은 파발이 시작되는 도시였습니다. 다마스쿠스와 바빌론으로 연결되는 도로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사람들과 물산이 모이는 곳으로 예수께서 심혈을 기울여 온갖 기적과 표징을 실현하시던 장소였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선포에 귀 기울이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축복을 거절한 셈이었습니다. 그 도시들은 에사우가 저지른 잘못을 범한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예수께서 언급하신 세 장소는 지금은 폐허가 되어 아무도 살지 않는 유령의 땅이 되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어떤 축복도 그것을 마다치 않고 받아들이며 가꾸고 지키려는 원의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축복은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며, 받기만 할 것이 아니라 합당한 자세로서 소통할 때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또한, 축복은 누구나가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또 병든 부모를 위해 자식이 부모에게 드릴 수도 있습니다. 꼭 사제라야 축복을 내릴 수 있지는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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