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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간적, 진보, 정치, 악의 강물, 사는 것, [현 교황님 강론]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18 조회수346 추천수1 반대(0) 신고
 
 
 
아래는 '교황님 강론' 방송 링크
 
 
 
 
 
 
 아담과 그리스도    /   베네딕토 16세 교황님
 
방송 내용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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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성 바오로 - 아담과 그리스도 (원죄에서 자유로) * 2008. 12. 3 바오로 6세 강당 *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교리교육에서 아담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짚어보겠습니다. 그것은 성 바오로가 로마서(5,12-21)에서, 원죄에 관한 교리의 본질적인 노선들을 교회에 수여하는 바로 그 페이지에 명백히 드러납니다. 사실, 코린토1서에서 이미 부활에 대한 믿음을 다루면서, 바오로는 첫 조상과 그리스도를 이렇게 대비했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첫 인간 아담은 생명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1코린 15,22-45) 로마서 5,12-21과 더불어 그리스도와 아담 사이의 대비는 더욱 더 세분되고 밝아집니다. 바오로는 아담에서 율법으로, 또 율법에서 그리스도로 구원의 역사를 짚어나갑니다. 이 장면의 중심에서 아담의 죄가 인류에게 미친 영향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인류에게 넘치도록 부어진 은총만큼 많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에 관해 “훨씬 더”라는 표현을 반복하는 것은, 그분 안에서 받는 선물이 아담의 죄와 그것이 인류에게 미친 결과를 얼마나 더 멀리 뛰어넘는 지 강조합니다. 이렇게 해서 바오로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죄가 많아진 그 곳에 은총이 충만이 내렸습니다.”(로마 5,20) 그러므로, 바오로가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에 그리는 대비는 둘째 사람의 탁월함에 비해 첫 사람의 열등함을 밝히 드러냅니다.

 

다른 입장으로 바오로가 아담의 죄를 언급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선물을 받음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만일 은총의 중심성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면, 바오로는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습니다.”(로마 5,12)라고 죄에 대해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신앙에서, 원죄에 관한 믿을 교리에 대한 자각이 성숙하게 된 것은, 그것이 그리스도 안의 구원과 자유라는 또 따른 믿을 교리와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의 의화라는 지평을 이해하지 못한 채, 구원이라는 맥락으로부터 동떨어져 아담의 죄와 인간의 죄를 다루어서는 절대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인들로써 우리는 자문해야 합니다. “과연 이 원죄는 무엇인가? 성 바오로의 가르침은 무엇이고, 교회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오늘도 여전히 이 교리가 설득력 있는 것인가?” 많은 사람들은 진화론의 역사에 비추어, 첫 죄가 있었고, 그것이 인류의 역사 전체에 퍼졌다는 교리는 설 자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로, 구속과 구세주의 문제도 기초를 잃어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과연 원죄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질문에 대답하려면 우리는 원죄에 관한 교리의 양면을 구별해야 합니다. 우선 경험적인 면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모두에게 구체적이고, 눈에 보이며, 만질 수 있는 현실입니다. 그리고 신비적인 면이 존재하는데, 이 사실의 본원론적 기초에 관한 것입니다. 경험적 자료는 우리 존재에 하나의 모순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 편으로 모든 사람은 선을 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내면으로 그렇게 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반대로 이기주의와 폭력의 길을 따라가고 싶은 다른 충동도 느낍니다. 선을 거스르고, 하느님을 거스르고, 이웃을 거스르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 마음에 드는 일만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성 바오로는 로마서에서 이런 우리 존재의 모순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7,18-19) 우리 존재의 이런 내적 모순은 이론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매일 저마다 그것을 겪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주위에서 이 두 번째 뜻이 더 강함을 봅니다. 불의와 폭력, 거짓과 음욕에 관한 일상의 뉴스를 생각해보면 충분합니다. 매일 우리는 그것을 봅니다. 하나의 사실입니다.

 

우리 영혼 속에 존재하는 이 악의 세력의 결과로, 역사 속에 인류 역사의 지리를 중독시킨 더러운 강물이 흘러 퍼졌습니다. 위대한 프랑스 사상가 블레즈 파스칼은 원래 우리 착한 본성보다 우월하게 나타나는 “제2의 본성”에 대해 말합니다. 이 “제2의 본성”은 악을 마치 정상이듯 사람에게 나타내 보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인간적이다.”라는 평범한 표현이 이중적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이 사람은 인간적이다.”라는 말은 이 사람이 착하고, 사람이 행동해야 할 방식으로 참으로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인간적이다.”라는 말은 거짓을 말하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곧 악이 정상이며 인간적이라는 뜻이지요. 악이 마치 제2의 본성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이 인간의 모순은 우리 역사에 오늘도 구원에 관한 소망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또 그래야 합니다. 실제로, 세상이 변화되고, 정의와 평화와 선의 세상이 창조되라는 약속은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정치에서도, 예를 들면, 모두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더 정의로운 세상을 창조하려는 필요를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자신 안에서 체험하는 모순으로부터의 해방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표현입니다.

 

인간의 마음과 인류의 역사 속에 존재하는 악의 세력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이 악은 어떻게 설명되는가?” 그리스도 신앙을 도외시한 철학의 역사 속에서, 여러 변이와 더불어, 근본적인 설명의 모델이 하나 존재합니다. 이 모델은 “존재 자체가 모순이다. 존재 자체가 선도 악도 지니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고대에 이 사상은 성선설과 성악설이라는 동등한 두 개의 근본 원칙이 따로 존재한다는 의견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분법은 극복할 수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이 두 원칙은 동일한 수준에 있으며, 따라서 언제나, 존재의 기원부터, 모순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존재의 모순은 말하자면 두 가지 신성한 원칙 사이의 반대 만을 투영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세상에 대한 무신론적, 진화론적 설명에서 이와 같은 시각이 다시 대두됩니다. 이런 개념에서는, 존재에 관한 시각이 일원론적일지라도, 존재는 그 자체로 처음부터 선과 악을 지니고 있다고 가정합니다. 존재 자체는 선하지 않으며, 선과 악을 향해 열려 있다고 합니다. 악도 선 못지 않게 똑같이 근원적인 거라고요. 인류 역사는 앞서 말한 진화론 전체에 이미 존재하는 모델 만으로 발전하게 되리라는 생각이지요. 즉 그리스도인들이 원죄라고 부르는 것이 실제로는 존재의 혼합된 성격이며, 이 이론에 따르자면, 그 선과 악의 혼합이 존재라는 천 자체에 이미 새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따지고 보면 절망적인 시각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악은 극복될 수 없는 것이지요. 결국 자신의 관심사만 중요합니다. 모든 진보는 악의 강물로만 대가를 치를 수 있으며, 진보를 위해 봉사하려는 사람은 이 대가를 치르기를 받아들여야만 하리라는 것입니다. 결국 정치는 바로 이런 전제 위에 심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우리는 봅니다. 이 근대 사상은 결국 비애와 냉소주의를 자아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 다시 물어봅시다. 성 바오로가 증언하는 믿음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처음에 다룬 것처럼, 이것은 두 가지 본성 사이의 경쟁이라는 현실을 확인해 줍니다. 악이라는 사실이 창조 전체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로마서 7장에서 들었습니다. 거기 8장도 추가할 수 있겠습니다. 악은 그저 존재합니다. 우리가 짧게 살펴본 고통스런 이분법이나 일원론에 반하여, 설명처럼 믿음은 우리에게 “빛의 신비와, 빛의 신비로 둘러 싸인 밤의 신비가 존재한다.” 라고 말합니다. 빛의 신비의 처음은 이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성선설과 성악설의 두 원칙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원칙뿐이라고 말합니다. 즉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원칙입니다. 그것은 악의 그늘이 전혀 없는 선하기만 한 원칙입니다. 그래서 존재는 선과 악의 혼합일 수 없습니다. 존재는 그 자체로 선하며, 따라서 존재하는 것이, 사는 것이 좋은 일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기쁜 소식입니다. 선의 원천인 창조주만이 존재하십니다. 그리고 어둠과 밤의 신비가 따릅니다. 악은 존재 자체의 근원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동일하지 않습니다. 악은 창조된 자유, 악용된 자유에서 나옵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어떻게 그랬을까요? 이것은 어둠으로 남아 있습니다. 악은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선 만이 논리적이며, 빛입니다. 악은 신비롭게 남아 있습니다. 창세기 3장이 설명하는 것처럼, 나무 두 그루와 뱀, 그리고 죄인의 이미지로 위대하게 소개됩니다. 우리에게 짐작하게 해 주지만, 그것이 얼마나 비논리적인지 설명하지 못하는 위대한 이미지입니다. 짐작할 수 있지만 설명하지 못합니다. 바로 곁에 있는 사실처럼 이야기하지도 못합니다. 훨씬 더 심오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어둠과 밤의 신비는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금방 빛의 신비가 따라옵니다. 악은 종속적 근원에서 나오며, 하느님은 빛과 더불어 더 강하십니다. 그러므로 악은 극복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피조물은, 사람은 다시 치유될 수 있습니다. 이분법이나 일원론적 진화론도, 사람이 다시 치유될 수 있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악이 종속적인 근원에서 나오므로, 사람이 다시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은 옳습니다. 지혜서는 말합니다. “당신께서는 나라들도 다시 치유할 수 있게 만드셨나이다.”(1,14 불가타역) 마침내, 결론적으로, 사람은 치유될 수 있는 존재만이 아니라, 실제로 치유된 존재입니다. 하느님은 치유를 가져다 주셨습니다. 역사 속으로 몸소 들어오셨습니다. 악의 지속적인 근원을 순수한 선의 근원으로 막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새 아담은 악의 더러운 강물을 빛의 강물로 막으셨습니다. 이 강물이 역사 속에 존재합니다. 성인들, 위대한 성인들, 겸손한 성인들, 소박한 신자들을 우리는 봅니다.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빛의 강물이 실제로 있으며, 힘차다는 것을 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대림시기입니다. 교회의 어투로 대림은 ‘현존과 기대’라는 두 의미가 있습니다. 빛은 현존합니다. 새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와 함께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이미 빛이 비치고 있으니 우리 마음의 눈을 뜨고 빛을 봄으로써 빛의 강물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느님께서 몸소 선의 새로운 근원으로 역사 속에 들어오심을 감사합시다. 그런데 대림은 ‘기대’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악의 어두운 밤은 아직 강합니다. 그러므로 대림 동안 하느님의 옛 백성과 더불어 기도합시다. 끈기있게 기도합시다. 오소서! 예수님, 오소서! 빛과 선에 힘을 주소서. 거짓과 하느님에 대한 무지와 폭력, 불의가 지배하는 곳으로 오소서! 오소서! 주 예수님, 세상에서 선에 힘을 주시고, 저희가 당신 빛을 가지고 가는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진리의 증인들이 되게 하소서. 오소서! 주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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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주님의 길을 곧게 닦음]
 
작성자   장이수(tpwkdygks624)  쪽지 번  호   137734
 
작성일   2009-07-15 오후 10:06:12 조회수   80 추천수   14

많은 사람들이 잘못한 것들에 대해 비난함으로써
자신의 사랑이 건재하고 있슴을 보여 주고자 한다.
 
사실 살아가면서 어려운 이웃에게 발걸음을 멈추어 서서
실질적인 사랑의 행동은 인색할정도로 나타내지를 못하면서도
 
군중들이 소리치며 타인의 잘못된 처지를 힐난하는 자리에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군중들 속에서 자기 자신도 드러내려 애쓴다.
 
남에게 알리고자 하는 심리 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어떤 합리화, 어떤 포만감이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 홀로 있을 때에 지나가다 마주치는
걸인이든, 병든 자이든, 혹은 불쌍한 사람에게는 쉽사리 등을 돌리지만
 
대단한 일이라도 일어난 듯이 온 군중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올 것같은 소동이 나면
어김없이 자기 발걸음을 거기에 재촉하면서 자신도 거창하게 소리 지르는 것이다.
 
홀로 있는 경우의 '숨은 일'에는 타당한 이유를 생각해 내어 등을 돌리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는 일 앞에서는 자동적으로 주저없이 재빠르게 나선다.
 
세상의 어두운 모습 안에 거울을 보듯 비쳐지는
자신의 고뇌찬 모습을 상상하면서
화려한 차림(허영심을 의미한다)으로 그런 세속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큰 거리에서 기도하는 것을 만인들에게 드러내 보이며 
많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영웅적으로 살아있슴을 스스로 자찬한다.
 
대중들 앞에서는 거창한 생명에 대해서는 말하여도
한 보잘것 없는 사람 앞에서는 피해 버리고 달아나는 것이다.
 
그런 세속 안에서 걸어 나오는 존재는 어둠의 세력들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은 볼 수 없다. 
 
"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죽은 행동'에서
어느 분같이 '희생제물'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자비에 대해서는 도무지 알지 못한다.
 
자비를 실행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에게도 '숨은 사랑'을 행할 줄을 아는
'살아있는 행동'을 실천하는 작은 자선(나눔)이다.
 
어둠을 물리치고자 하면서 사람을 없애는(사라지게 하는)
어둠의 세력들이 참된 '그리스도의 자비'를 무너뜨리게 하는 것이다.
 
사람을 위해서는
희생제물 보다 더 소중한 것은 자비이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이사야서 40, 3>
 
 
 
 
많은 사람을 구하여야 한다는 가식적인 위선에 대하여
 
작성자   장이수(tpwkdygks624)  쪽지 번  호   137745
 
작성일   2009-07-16 오전 8:43:45 조회수   326 추천수   17
 
 
 
 
광야 같은 메마른 땅에 주님께서 오시기를 소망하는 영혼들은 주님의 길(곧, 자비)을 곧게 내어야 합니다. 자신의 가식적인 태도 (자비가 필요한 한가지의 작은 ''숨은 일''에는 달아나지만, 군중들이 들고 일어나는 일에는 재빠르게 나서는 행태)에서는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곧게 낼 수 없습니다. 그런 세속적인 위선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겠다는 행태) 안에서 부르짖는 것들은 어둠의 세력들이 그 속에서 나오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가식적인 거짓의 위선 안에서는 주님께서 사람들 가운데로 오시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대중을 구하겠다고 부르짖는 이념들 속에서는 생명이 없게 되지요. 중요한 목적인 사람들이 오히려 사라지게 되어 사람들은 이념의 도구화로 변질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곧게 내지 않는다면 평화와 생명 또한 가식적인 구호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주님이 없는 자리에 진정한 생명의 평화는 없지요. 자비를 걷어 치우고 투쟁을 일쌈는 곳에는 어둠의 세력들만이 사람들 가운데 와서 설치게 될 뿐입니다.
 
 
최영란님의 "누구든 스스로 의롭다 말할 때.. 하느님의 자비는 그를 떠날 것입니다." 라는 말씀은 이런 의미에서 저 역시 공감합니다.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겠다''며 이념을 들고 나올 때, 사람들의 생명과 평화는 다소 희생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한다는 바탕이 되는 전제가 그 이념 안에는 깔려 있게 되지요. 결국 많은 생명을 구하겠다는 인간의 이념(뱀의 논리)이 목적의 대상인 사람들을 없애는 것입니다. 결코 남게 되는 것은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게 아니라 도리어 이것을 위해 한사람씩 죽이고 가게 됨으로써 해결되지도 않고 결말은 사람을 없앤 어둠의 세력만을 키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념 아래에서 투쟁하는 사람들은 겉 보기는 좋아 보여도 속에는 어둠의 세력들이 지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식적인 행태는 ''신앙의 자비''는 무시하고 사람들(표적이 된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해결하는 ''자신의 포만감''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생명을 구한다는 그 거짓된 가식 속에는 표적이 된 사람들에 향한 미움이 도사리기도 합니다. 작은 '숨은 일' 곧 보잘것 없는 한 사람에게도 ''자비''를 실행하지 못한다면 주님의 길을 곧게 내는게 아니라 자기의 길을 내어 어둠의 세력들을 사람들 가운데로 불러 들이게 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사람을 위해서는 희생제물 보다 더 소중한 것은 자비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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