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영원한 안식이 있으니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19 조회수810 추천수12 반대(0) 신고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연중 제 16 주일 - 영원한 안식이 있으니

 

 

 

제가 처음 서품을 받고 발령을 받아 간 성당은 신자가 만 삼천 명이나 되는 큰 성당이었습니다.

보좌지만 그래도 첫 사목을 한다는 생각에 걱정도 되고 기대도 되는 가운데 성당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자매님이 저를 붙잡더니 "신부님, 저희가 저 앞에서 작은 병원을 하나 하는데 링거 한 번 맞으러 오세요."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건강한데, 무슨 링거에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님은, "오시게 될 거예요."라는 말만 남기고 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살아보니 정말 힘들었습니다. 워낙 신자가 많아서 미사 전후로 고해를 드려야 했고 고해가 끝나면 교리, 면담, 레지오 훈화 등이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단 30분 쉴 틈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또 열심히 하겠다는 마음에 쉬는 월요일마다 수녀원에 강의를 나갔습니다. 그 와중에 주임 신부님까지 몸이 안 좋아지시고 입원하셔서 매일이 주일처럼 바빴습니다. 잠 한 번 푹 자보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이렇게 몇 달 지내다보니 처음 제가 도착했을 때 저에게 해 주신 그 자매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잠깐 틈을 내서 그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우선 핸드폰을 끄고 링거를 놓아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아직까지 그 때 링거를 맞으며 잠깐이나마 눈을 부칠 때만큼 달콤한 잠을 자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링거를 맞아 에너지가 보충된다는 느낌보다는 참 수고했다고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품에 안겨 쉬는 느낌처럼 평화롭고 행복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이런 맘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지나면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고 그 때마다 링거가 생각이 나서 수차례 시간을 내서 링거를 맞으며 쉬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복음전파를 위해 고생하고 온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도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라고 하십니다.

인간을 포함한 세상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일하고, 쉬어야 되게끔 만들어져있습니다.

도 쉬어주지 않고 며칠을 계속 달리면 엔진이 과열하여 파열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몸도 며칠 동안 쉬어주지 않고 계속 일만하게 되면 망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식물도 광합성을 하지만 하느님께서 낮과 밤을 만들어주시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쉬도록 섭리해주셨습니다. 쉬지 않는 동물은 없습니다. 모든 동물은 먹이를 얻기 위해 노력하지만 먹고 나면 소화시키기 위해 잠을 잡니다.

하느님도 육일동안 일 하시고 이렛날에는 쉬셨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느라 힘드셔서 쉬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기에 지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도 쉬셨으니 인간도 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정해진 것이고 그 안식일에는 하던 모든 일을 접고 쉬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쉬려하지 않고 일을 계속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은 하느님보다 더 지치지 않는 사람이고 자연법을 초월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학교에서 공부시간을 더 늘리기 위해서 쉬는 시간을 없앴다고 합시다. 더 능률이 오르기는커녕 얼마 안가서 다 공부라면 꼴도 보기 싫어할 것입니다. 더 능률을 올리기 위해서는 적당히 쉬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두 사람나무 자르기를 한다고 합시다. 둘 다 같은 조건인데 한 사람은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계속 톱질만 하고 한 사람은 50분 자르고 10분 쉬면서 잘랐습니다. 하루 종일 나무를 더 많이 자른 사람은 누구겠습니까? 처음에는 쉬지 않는 사람이 더 많이 자를 수는 있어도 조금만 지나게 되면 바로 역전되게 마련입니다.

이렇게 사람을 포함한 모든 것들은 쉬어야 더 능률이 좋아지는 것을 인정한다면 무리하지 말고 자신을 포함해서 직원과 기계 등을 일주일에 한 번은 쉬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안식일에 반드시 쉬고 십일조를 철저히 바치는 유다인들이 가장 부자이고 노벨상도 가장 많이 타는 능력 있는 민족이 되었음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의 법을 정말 충실히 지킵니다. 우리로 말하면 구약의 법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법만을 그렇게 잘 지켜도 하느님께서 얼마나 큰 축복을 주시는지 잘 보고 깨달아야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잘 쉬는 방법일까요? 먼저 일해야 할 시간엔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하루로 치면 밤은 쉬는 시간이고 낮은 일하는 시간입니다. 낮에 열심히 일한 사람은 밤에 지쳐 쓰러져서 꿀 같은 휴식을 취합니다. 그러나 낮에 일하지 않고 방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한 사람은 밤에 잠이 오지 않습니다. 낮에 이미 충분한 휴식을 취한 이유도 있고, 양심의 가책 때문이기도 합니다. 양심은 우리가 죄를 지으면 신호를 보내는데 그것이 불안함입니다. 맘이 불안해서 불면증에 걸리는 것입니다. 하느님도 육일동안 열심히 일하셨는데 하물며 인간인 내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게으름만 피웠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불안하여 잠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칠일에 하루는 쉬셨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육일 동안 열심히 일하셨다는 것입니다. 월급 주는 사람도 없고 일하실 필요도 없으신 하느님께서도 육일 동안 열심히 일하셨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쉬라고 하신 말씀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참다운 쉼’은 쉬고 난 후에 다시 삶의 에너지가 솟아나야 합니다. 이제 바캉스 철입니다. 오랜만의 휴가인데 대부분이 휴가가 끝나면 더 일이 하기 싫고 더 지쳐서 며칠간은 일도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이것을 바캉스 후유증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휴가동안 쉰 것이 아니라 더 고생을 한 셈입니다. 이런 현상은 왜 일어나느냐 하면 일반적으로 사람을 만나는 것은 에너지를 얻기 보다는 에너지를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외딴곳으로 가서 쉬라는 것은 홀로 외롭게 있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함께 있자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40일 동안 광야에서 홀로 하느님을 만나 기도하며 3년 동안 활동할 에너지를 얻으셨듯이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삶의 에너지를 얻어야합니다. 로 말하면 연료와 같은데 연료가 떨어지면 차는 가고 싶어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계기판에 연료등이 빨갛게 들어온다면 우리는 재빨리 주유소를 찾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몸과 마음이 지친다고 느끼면 하느님을 찾아나서야 하는데 우리가 주유 받아야 할 곳은 바로 성당입니다. 성당이 주유소입니다. 조용히 앉아서 쉴 수도 있고 기도하고 미사하고 성경묵상도 하면서 우리 안에 에너지를 채울 수 있습니다.

사막의 교부 안토니오는 사막에서만 홀로 살았던 것이 아닙니다. 큰 도시 알렉산드리아로 내려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 이단들과 논쟁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사막으로 돌아갔는데 더 있어달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하였습니다.

“물고기가 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당에는 성령의 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여러분이 쉬기 위해서 힘을 얻기 위해서 다시 돌아와야 할 곳은 성당입니다. 이 안에는 예수님의 심장인 성체로부터 흘러나오는 성령의 물이 성당 안에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물 안에서만 살 수 있는 물고기들입니다. 너무 장시간 물 밖을 떠나있다가는 숨이 막혀 죽게 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모두 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마태 11,28-30)라고 하시며 우리를 초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마지막에 반전이 일어납니다. 예수님도 쉬셔야하고 제자들도 쉬어야 하는데 많은 군중이 이미 그들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배로 호수를 잘라서 오는 것이 육로로 돌아오는 것보다 상식적으로 훨씬 빠릅니다. 육로로 호수를 돌아서 그들보다 먼저 도달했다는 이야기는 그 군중들이 매우 절박한 마음으로 뛰었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들보다 먼저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보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큰 연민을 느끼십니다. 그래서 쉬시지도 못하시고 그들을 가르치십니다. 이것이 참 목자의 정신입니다. 물론 쉬어야하지만 양들이 필요하다면 쉼조차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고 이것 자체가 하나의 순교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상황을 이렇게 비유해 주셨습니다.

"제가 시골에서 클 때, 어머니가 하루 종일 바깥에서 일을 하시고 얼굴이 햇빛에 벌겋게 달아올라 집에 돌아오셨을 때 밥을 기다리는 우리들을 보고 쉬지도 못하시고 다시 저녁을 차리시는 모습이 떠오르네요."

아빌라의 데레사는 하루 종을 성당에만 앉아있는 수녀에게 수시로 가서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왜냐하면 기도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기도에서 얻은 에너지를 이웃에서 쏟아 부어야하는 것이 더 큰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타볼산에 머물자는 베드로를 데리고 다시 세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 두 계명 중 마지막에,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하시며 이웃 사랑 하나만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물론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하면 이웃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이 세상에선 일을 해야 합니다. 기도를 하다가도 필요한 사람이 나를 찾는다면 기도를 포기하고 이웃사랑을 선택할 줄 알아야합니다. 이것이 참으로 엄마와 같고 예수님과 같은 마음입니다. 또 이렇게 살다가 쓰러져 죽는 것을 걱정하지 맙시다. 오히려 그렇게 지쳐 쓰러지는 삶을 살아야만 죽음을 평화로운 안식으로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