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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205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26 조회수400 추천수3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연중 제 17주일]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15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2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4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5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6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7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8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9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0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11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12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14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한 기적 중에서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기적은 오늘 복음인 오병이어의 기적이 유일한 것 같습니다. 그동안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하여는 몇 번씩 묵상하였으며 지금까지 묵상한 내용은 나눔의 실천으로 또는 육의 양식이 아니라 말씀인 영적 양식으로, 또는 성체성사로 묵상한 것 같습니다. 하여 오늘은 이러한 묵상에서 벗어나 비평적 시각에서 묵상하는 것도 나름대로는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비평적 시각에서 묵상하기에 앞서 예전에 미처 묵상하지 못하였으나 오늘 새롭게 떠오르는 묵상을 요약하면, 사리분별을 할 줄 아는 장정만 오천 명인데 그들은 다 빈손으로 왔고 철모르는 어린 아이만 자기 먹을 것을 챙겨왔다는 얘기는 전혀 공감할 수 없으므로 자기의 것을 전부 내놓은 어린 아이를 통하여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마태 18,3) 하신 말씀과 연계하여 묵상하여도 좋은 묵상을 할 수 있으며.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하신 말씀은 하느님이 참된 예언자를 보내주셨으므로 이제는 구도의 삶을 살기 위해서, 구원받기 위해서, 이 땅을 하늘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 더 이상 방황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묵상하고 있습니다,

또 모두를 배불리 먹여 준 이유 때문에 임금으로 삼으려고 하자 예수님께서 산으로 물러가신 점에 대하여는, 예수님은 자기 뱃속만 챙기는 자들과는, 황금 송아지를 섬기는 자들과는 함께 할 수 없음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재물에 눈이 멀어서‘경제를 살리겠다'는 감언이설에 속아서, 뉴타운이라는 황금 송아지에 속아서 그동안 힘들게 쌓아왔던 올바른 가치관들이 순식간에 사라져가는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을 생각해 보는 묵상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이런 묵상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세상에 그 어떤 악한 일이라 할지라도 합리화시키려면 합리화시키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바로 이런 행위들 때문에 이 땅에 하늘 나라를 건설하는데 장애가 되고 있음을 요즘 절실히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성경 말씀이라 하여도 이성적으로,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잘못된 것임에도 이를 합리화시키려는 묵상이 과연 올바른 묵상인지에 대하여 묵상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대하여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나눔의 실천'과 '말씀인 영적 양식' 또는 '성체성사'로 묵상할 수 있고, 이런 묵상을 공개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획득한 것도 불과 100여년 이내에 불과하며 이런 해석을 할 수 있도록 물꼬를 트신 분은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입니다. 톨스토이는 기존의 해석과는 다른 시각에서 성경을 해석하고, 불쌍한 민중들을 외면하고 민중들 위에 군림하는 교회를 비판한 이유로 파문당하여 시골의 허름한 역사에서 외롭게 죽음을 맞이한 사실은 새삼 얘기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불과 얼마 전 까지만 하여도 오늘 복음과 같은 이적 등을 실제 사실로 받아드리지 않으면 모두 이단으로 정죄하였습니다. 지금도 이런 이적 등을 실제 사실로 받아드리지 않으면 이단으로 정죄하려는 그런 근본주의 신앙관을 가진 분이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가톨릭은 교리에 대하여는 여전히 보수적인 신앙을 고수하고 있지만 성경 해석만큼은 개신교보다는 비교적 자유로운 해석이 가능한 것은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 해석의 이러한 관용도 오늘 복음과 같은 이적 등을 실제 사실로 고집하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통용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선택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아직도 우리가 중세와 같은 미개한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였다면 오늘 복음도 실제 사실로 믿어야만 홍위병들에 의해서 자행된 이단논쟁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복음서에 이런 이적 등을 기록한 이유는 예수님은 그 어떤 예언자보다 위대하다는 사실을 알리는데 목적이 있으며 요한복음서 기자는 오늘 복음에서도 사실상 이를 실토하고 있습니다.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라는 군중들의 말을 기록한 것은 오늘 복음을 기록한 이유임을 스스로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예수님은 전지전능한 하느님의 아드님이기 때문에 이적 등을 실제 사실로 믿지 않으면 이단으로 처형하였습니다.

이제는 이런 이적 등에 관계없이 예수님은 위대한 예언자로 모두가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영원불변한 진리의 말씀으로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심지어는 무슬림까지도 모두가 인정하고 있으므로 예전처럼 믿음으로 우리 신앙심을 판단하는 것은 중세이전의 미개한 사람들에게나 통용되었던 유치한 잣대이므로 이제는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인이며, 아직도 이단 논쟁을 그렇게 하고 싶다면 말씀의 실천여부로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이런 이적 등은 지금은 오히려 잘못된 기복 신앙만 심어줄 뿐이어서 이런 이적 등은 차라리 없는 것이 이제는 더 도움이 될 것이므로 그 시효가 다 끝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말할 때에‘예.’할 것은‘예.' 하고,‘아니요.’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 37)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잘못된 것은 더 이상 합리화시키려고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과 같은 이적 등을 묵상을 통하여 합리화시키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하여 묵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매사를 합리화시킨다면 우리는 그 어떤 것도 비판할 수 없으며 악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하여도 비판은커녕 예스맨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이 우리 그리스도교가 태동될 때부터 오늘처럼 자유로운 묵상이 가능하였다면 물론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천년 가까이 기복신앙을 심어주는데 활용하다가 이제는 그 시효가 끝나가자 그 속에 담긴 뜻을 찾아야 한다며 합리화시키는 것이 과연 올바른 신앙인의 태도인가를 함께 고민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찾아서 이를 묵상하라는 말씀을 하기 이전에 과거의 잘못부터 반성하는 태도가 선행되어야 하고. 또 과거의 잘못된 성경해석에서 비롯된 교리 등도 재검토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과거를 반성하는 진정성이 있다 할 것입니다.  

사실은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 때문에 오늘 복음을 이런 시각에서 접근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과거의 행위에 대하여는 전혀 반성하지 않고 여야 입장이 바뀌면 철면피도 그런 철면피가 없습니다. 자신들이 한 일을 국민 모두가 기억하고 있는데 입장이 바뀌었다고 자신들이 한 행위를 부인하는 일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무슨 짓을 하든지 박수를 보내는 모습을 보면 우리의 일부 모습인 맹신자들과 하나도 다를바가 없어 보입니다. 묻지마 지지자들이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으며 맹신자들이 우리 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위장전입, 부동산 투기, 논문표절, 병역문제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위 공직자 임용에서 낙마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입장이 바뀌자 이 모든 것을 합리화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합리화시키는데 일조하는 보수언론들과 논리개발에 여념이 없는 소위 식자들의 이중적인 태도에 이제는 지긋지긋합니다. 그럼에도 저 역시 성경이기 때문에 그 어떤 말씀도 합리화시키려는 그런 제 자신을 발견하고 있으므로 오늘 묵상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이런 실정임에도 우리 교계 제도보다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선진화 되어 있습니다. 대표자를 선출함에 있어서는 투표권을 행사하는 민의의 제도가 있고 고위 공직자 임명에는 청문회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에서도 이런 제도를 도입하자는 주장은 아직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추기경도 우리 손으로 선출하고 주교를 임명함에 있어서도 청문회를 통해서 검증할 것은 검증하는 이런 제도를 우리 교회가 먼저 도입했어야만 우리 교회가 사회를 선도하여 이 땅에 하늘 나라를 건설할 수 있음에도 사회 변화를 선도하기는커녕 아직도 중세 절대왕권시대에 머물고 있으므로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에 뒤 따라가기도 요원한 것 같습니다. 아직도 신학생들에게는 과거 군대보다 더 엄격한 규율인 성타식(聖打式)라는 규율이 있다고 하므로 聖이 俗을 선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俗이 聖을 선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 내부에서도 이제는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우리 교회도 발전할 수 있고 영원한 생명력이 생겨날 것입니다. 이는 성경 말씀이라 할지라도 예외가 될 수 없으므로 나머지 것들은 더 말할 나이도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를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기복신앙으로 변질되도록 원인을 제공한 오늘 복음 등에 대하여 과거 반성 없이 이제 와서 마냥 합리화시켜서 묵상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태도일까?, 또 실제로 복음서 기자는 지금 우리가 묵상하는 이런 뜻으로 복음서를 기록하였을까? 또 이런 뜻으로 기록하였다면 굳이 이렇게 어렵게 기록하여 잘못된 기복신앙을 심어준 그 병폐를 이제라도 시정해야 한다는 뜻에서 몇자 적어 본 글로 오늘 묵상에 대신합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은 말씀은 비유로 말씀하셨으나
행하신 모든 일은 실제의 행위이므로 과장이나 비유가 성립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에는 이적 등에 관한 여러 과장된 행적과
묵상을 통해서 합리화시켜야만 이해할 수 있는 많은 말씀들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부작용이 일어나고 있으므로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 알려주신 말씀이
저희 교회의 오늘의 현실과는 너무나 멀게만 느껴집니다.
지금이라도 저희 모두에게 성령을 보내주시어 모든 것을 원점에서 다시 생각하여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따르미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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