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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기와를 닦아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9-08-07 조회수498 추천수4 반대(0) 신고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을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Amen, I say to you, there are some standing here who will not taste death until they see the Son of Man coming in his Kingdom).”(마태오 16: 26-28)
 
어떤 물건이 자신의 소유가 되어 있으면 그것을 남에게 주고 싶어진다. 그러나 어떤 물건이 자신의 소유물이 아닐 때에는 그것을 가지려고 집착하게 된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는
‘넉넉한 사람(rich man)’이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쌓아두는 사람이 아니라 더 많이 주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풍족한 사람(wealthy man)’은 돈이나 재산을 쌓아둠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가난한가를 남에게 보여주는 사람이다. 이 사실은 다른 면에서 더 극명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자신이 사랑을 가지고 있을 때에만 남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다. 또 어떤 것에 자신이 생명을 걸거나 남에게 생명을 걸 때에만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
 
우리는 매사에 자기 자신을 ‘잘 되게’ 하려고 노력한다. 먼저 물질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더 나은 컴퓨터를 가지려 하고 더 좋은 차를 가지려 하고 더 좋은 직장을 가지려고 한다. 그리하여 ‘더 나은 사람(better)’이 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언뜻 보면 가치 있는 목표처럼 보인다. 그러나 에고(ego)가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것을 경험을 통하여 알게 된다. 사회도 에고를 갖고 있다.
에고에 따라 산다는 것은 물질을 만능으로 생각하면서 또 쾌락을 따라 살면서 아까운 시간을 죽이고 사는 것이다. 이는 결코 새로운 삶이 아니다.
오늘의 복음은 우리들에게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고 ‘새로운 사람’이 되라고 말하고 있다. ‘더 낫다는 것’은 ‘좋은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자신의 에고가 좋아하는 것을 신봉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러나 사회의 ‘선(善)’에 대한 정의가 잘못되어 있다. 우리는 선에 대한 잘못된 정의에 따라 그릇된 가치관을 갖고 있다.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조직에 따라 ‘풍족한 사람’을 좋아하거나 많이 팔아주는 소비자를 좋아하거나 무조건 순종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이의 예이다.
그런데 복음에서는 우리의 삶을 더 낫게 만들지 말고 버리라고 말하고 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썩어 없어지는 생명보다 더 좋지 않은 것은 썩어 없어질 생명을 애지중지하면서 보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성인이 “썩어 없어질 생명”이라고 한 것은 “자기 과시”였다. 성경은 다른 어떠한 것보다 심오하다. 오늘의 복음에서는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에고(ego)’와 ‘본성(true nature)’을 구분하지 못하면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 
그리스도교의 영성학에서도 이를 분명히 구분하여 설명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선(禪) 불교에서는 이를 분명히 설명하고 있다. 이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중국의 회양(懷讓)선사(677-744)가 설법을 하자 한 수좌(首座)가 와서 불철주야 공부를 했다. 그런데 이 수좌는 항상 좌선(坐禪)하는 것만을 고집하여 자리를 뜨는 법이 없었다.
하루는 회양 선사가 잘못을 고쳐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좌선중인 마조(馬祖, 709-788) 스님에게 말을 건넸다.
수좌는 좌선하여 무엇 하려는가?”
부처가 되고자 합니다.”
그러자 회양 선사는 암자 앞에서 벽돌을 하나 집어와서 마조 스님 옆에서 묵묵히 갈기 시작했다. 마조 스님이 한참 정진을 하다가 그것을 보고는 여쭈었다.
스님, 벽돌은 갈아서 무엇 하시렵니까?”
거울을 만들고자 하네.”
벽돌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들 수 있습니까?”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지 못할진대, 좌선을 한들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소를 수레에 매서 수레가 가지 않을 때 수레를 쳐야 옳겠는가, 소를 때려야 옳겠는가?”
마조 스님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회양 선사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대는 좌선(坐禪)을 배우는가, 좌불(坐佛)을 배우는가?
앉아서 참선하는 것을 배운다고 한다면 선(禪)은 앉거나 눕는데 있는 것이 아니니 선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고,
앉은 부처를 배운다고 한다면 부처님은 어느 하나의 법이 아니니 자네가 부처님을 잘못 알고 있음이네.
무주법(無住法)에서는 응당 취하거나 버림이 없어야 하네.
그대가 앉은 부처를 구한다면 부처를 죽이는 것이고, 앉은 모습에 집착한다면 선(禪)의 이치를 깨닫지 못한 것이네.
마조 스님은 여기에서 크게 뉘우치는 바가 있어서 좌선만을 고집하던 생각을 버리게 되고 마침내 크게 깨달았다.
 
좌선만 고집하는 것은 마치 신자들이 교회에 열심히 나가고 열심히 기도하면서도 새로운 사람이 되지 못하여 기쁨과 평화를 얻지 못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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