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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9-08-09 조회수409 추천수4 반대(0) 신고
토빗이 아내를 괜히 의심을 하고 난 후 말했다. "나는 마음이 몹시 괴로워 탄식하며 울었습니다. 그리고 탄식 속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다음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다.하느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눈이 먼 그를 낫게 해주셨다.(토빗기 3:1 참조)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유대교 랍비 해럴드 쿠쉬너(Harold Kushner)는 그의 장남 아론이 태어나서 8개월 되면서부터 몸무게가 더 이상 늘지 않고 머리털이 빠지기 시작했을 때 그 아이를 진단한 의사로부터 충격적인 사실을 통보 받았다. 아론은 프로게리아라는 조로증(早老症)에 걸렸으며 키는 아무리 자라도 1미터를 넘지 않을 것이고 아마도 20세가 되기 이전에 죽고 말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쿠쉬너는 도대체 어째서 이런 일이 그에게 일어나는 것인지 불공평한 이 세상과 딱히 누구에게랄 수 없는 막연한 분노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제까지 그는 선량한 사람이었고 옳다고 믿는 일만을 해왔으며 그가 아는 어떤 사람들보다도 진실한 신앙생활을 해왔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이토록 엄청난 불행이 그에게 닥쳐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도무지 이것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운명이며 한마디로 말도 되지 않는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아들이 14세에 요절했을 때의 비통함과 절망감을 『왜 선량한 사람들에게 뜻하지 않은 불행이 닥치는가(Why Bad Things Happen to Good People)』에서 담담하게 소개 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신자든 사목자든 이웃의 비통과 절망을 접할 때 함께 아파하기보다 하느님을 앞세워 강론하는 데 더 힘쓴다.”고 지적하면서 “그들의 고통과 비통, 그리고 그 때문에 솟구치는 울분에 대해 설명하려 들기보다 잠자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자식을 앞서 보내면서 그 동안 자신의 사목활동도 위로를 빙자해 설명을 늘어놨었고 고통 가운데서 빨리 회복하기를 바란다는 명목으로 그만 아파할 것을 강요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는 기도가 선한 이들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보증수표라기보다 오히려 고통 중에 있는 이웃과 연결해주는 마음의 고리라고 말한다.
 
왜 선량한 사람들에게 이러한 이유 없는 불행이 닥치는 것일까?
 
선량한 사람들에게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이러한 불행들은 이 세상이 적어도 옳고 공평하다고 믿고 싶은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심각한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이제까지 신자(信者)들이 모든 개인적 혹은 가정적인 문제들을 극복하고 이겨 나가도록 도움을 주어왔지만 그때마다 느꼈던 것은 끔찍한 불행을 당하기에는 너무나도 선량한 사람들이 의외로 뜻하지 않은 불행의 희생자가 되는 일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고통과 불행의 원인은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저지른 죄의 대가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견 그럴싸하게 보이는 이 견해에는 약간의 문제점이 있는데, 그것은 이 생각이 졸지에 뜻하지 않은 불행을 당한 건량한 사람들을 근거 없는 죄의식으로 한번 더 괴롭히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불행에 대해서 하느님만이 아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자신을 조금이나마 위로하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특별한 신의 섭리가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그것이 불행을 당한 사람의 고통을 덜어 줄 수는 없다.
 
쿠쉬너는 나서 죽을 때까지 14년 동안을 불구로 살다간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하느님께서 그를 보다 정신적으로 강하게 만드시기 위해서 일부러 그에게 불구 아들을 주셔서 그 고통을 겪게 만드시고 또 결국에는 그 고통을 극복해 냄으로써 그로 하여금 보다 완전한 사목자가 되게 하시겠다는 심오한 섭리로 그에게 그런 시험을 주셨을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위로를 받은 적은 단 한번도 없다고 고백한다.
물론 그는 그에게 닥친 이러한 불행을 가까스로 극복함으로써 결국에는 좀 더 좋은 사목자, 좀 더 남의 슬픔과 불행에 공감할 줄 아는 사목자가 되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 아들의 죽음과 얼마 되지 않는 이것들을 비교할 때 그의 선택은 명백한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아무리 불행에서 얻은 이득이 클지라도 그것을 겪지 않는 것만큼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인간에게 부닥치는 이런 불행들을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시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흔히 하느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시험은 애당초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것으로 그들의 생각을 보완하려고 한다. 하지만 경험에 비추어볼 때 이는 반드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이겨 나가면서도 끝까지 평정과 인간적인 감성을 잃지 않는 의연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 고통으로 인해서 더욱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져버리는 사람들이 더 많다. 만일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고통을 통하여 보다 강건하고 완전하게 연단하시려 한다면 아마도 이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시험에 성공하기 보다는 오히려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불행에 대한 이러한 반응들은 모두가 하느님이 모든 고통을 우리에게 내리고 있다는 가정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 것일까?
우리들의 불행은 의외로 전혀 하느님의 뜻과는 관계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편(121:1-3)에 보면 “산들을 향하여 내 눈을 드네. 내 도움은 어디서 오리오? 내 도움은 주님에게서 오리니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네 발이 비틀거리지 않게 하시고 너를 지키시는 그분께서는 졸지도 않으신다.”고 노래하고 있다. 시편 기자는 분명 “나의 고통이 하느님에게서 온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에게 불행과 고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고통과 불행에서 우리로 하여금 이겨 나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시기 위해서 존재하신다는 것이다.
 
그의 아들이 죽고 난 후 일년 반이 지난 어느 날 쿠쉬너는 그에게 일어났던 불행을 다른 어떤 곳에서 그 원인을 찾으려 하지 않고 하나의 엄연한 사실로써 받아들이기로 작정하고서야 그 동안 그를 괴롭혀왔던 자기 연민에서 헤어날 수가 있었다.
그는 이 세상이 결코 모든 고통에서 완전히 해방된 낙원도 아니며 또 그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이 모든 불행과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이 세상에서의 삶을 약속해 준 적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오직 우리에게는 고통을 당할 때에 우리가 결코 혼자 있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 이외에는 주어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불행이 선량한 사람들에게 닥쳐올 때 그것은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그 누구의 오묘한 섭리도, 우리의 잘못으로 인하여 하느님이 내리시는 징벌도 아니다.
우리는 우연하게 또는 무차별하게 우리에게 닥쳐오는 이러한 불행에 대해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그 불행의 비정함에서 해방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고통 받고 괴로워하면서 죽어가고 있는데 어찌 우리만 거기서 예외가 되어야 하는가? 이 세상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고통인 것을.
결국 문제는 왜 선량한 사람들에게 뜻하지 않은 불행이 닥치는가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것이다. 수 많은 불공평과 잔혹함과 질병과 범죄와 지진과 재난들로 가득 찬 이 불완전하고 모순투성이의 세상이 때로 우리를 실망시키더라도 이것을 사실로써 인정해야 한다.
설사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우리를 실망시키더라도 우리는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설사 하느님이 이 세상의 모든 죄악과 고통에 대해서 당장은 어떻게 하실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만일 이 모든 것을 이해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사랑과 용서야말로 하느님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이 불완전한 세상에서 완전하고도 용감하게 살아나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내려주신 유일한 무기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의 아들 아론의 짧은 생애가 그에게 준 교훈을 생각하면서 새삼 그가 그것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으며 또한 얼마나 많은 것을 얻었는가 생각하였다. 지난 날들이 그리 고통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때 비로소 다가 올 미래 또한 그리 두렵지 않은 것이다. 이른바 불교에서 말하는 “놓아버림”이다. 성경 말씀을 인용하면 “가급적이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되 보고 듣더라도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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