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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218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8-10 조회수378 추천수5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24-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25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진정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우리 또한 자기 목숨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 목숨은 그 무엇보다 소중하기에 영원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가 불의와 타협하고 재물이나 권력을 탐하는 것도 모두 살기위해서 하는 일들입니다. 모두가 살려고 발버둥치고 있지만 유한한 생명은 결국 모두 사라지게 되어 있으므로 우리 인생은 너무 짧고 죽음을 생각하면 우리 삶이 무상하기도 합니다.

유한한 삶을 어떻게 해야만 영원한 삶으로 바꿀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면 영원한 생명에 대한 예수님의 많은 말씀은 사실 공허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여러 사람과 대화를 할 때에는 공통 관심사에 대하여 대화를 하여야 하듯이 영원한 생명에 전혀 관심도 없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아무리 이야기하여도 귀에 들어올 리 없습니다. 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런 죽음의 문제를 늘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사실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는 아직은 별 관심이 없으며 죽음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도 않고 있으므로 오늘 말씀이 피부에 와 닿지 않는 것은 솔직한 고백입니다. 나와 관심이 다르다하여 틀렸다고 할 수 없듯이 제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하여 남에게 지탄받을 일도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영원한 생명을 생각하며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도 의문입니다. 그리고 불교적 관점에서는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모두 상에 집착하는 행위입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종교는 이러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생겨났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불교는 생로병사의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으며 우리 그리스도교는 영원한 생명을 사는 것으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살 수 있는가를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서 많은 열매를 맺는 자연의 이치에서 영원한 생명에 대한 답을 찾으신 것 같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후손들에게 유전자를 남김으로서 우리의 유전자는 대대로 이어가고 우리가 모은 재물도 후손에게 재물을 물러줌으로써 그 재물이 영원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습이 있는 이런 유형적인 것은 소멸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으므로 결코 영원할 수 없습니다.

형체가 있는 것은 유한할 수밖에 없으므로 형체가 없는 무형의 모습으로 변해야만 영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얼은 형체가 없기 때문에 얼 삶을 살아야 영원한 생명을 살 수 있으므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는 것이 얼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타적인 삶을 살아야 하고, 이처럼 이타적인 삶은 영원한 생명을 살기 위한 것이므로 이타적인 행위는 결국 가장 이기적인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 자기 자신을 혐오하는 사람으로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므로 자기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을 말씀하시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살 수 있다는 말씀이며, 지금 예수님은 민중의 구원하기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있으므로 제자들에게도 남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여야만 나를 따르는 길이라 하였습니다.

오늘은 "이 세상에서"의 의미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라 하였으므로 그럼 '저 세상'이 따로 있을까요? 이 세상이 이승이라면 저 세상은 저승이라는 뜻일까요? 저는 그런 의미보다는 이 세상은 육신의 삶을 말씀하신 것으로 묵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유형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형의 모습으로 얼로 영원히 존재하고 계시므로 우리도 얼 삶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유한한 생명의 상대 개념이므로 우리의 삶은 유한한 삶으로 끝이 난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유한한 생명이므로 이승의 삶에서 끝나고 저승도 없다는 뜻입니다. 만약 저승이 있다면 우리는 저승에서 또 살게 될 것이므로 그곳이 천당이던 지옥이던 그것은 차후 문제이고 하여튼 저승에서 또 사는 것이므로 영원한 생명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원한 생명은 저승에서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을 말씀하신 것인지, 아니면 이 세상에서 끝나는 삶은 너무 허무하므로 영원한 삶을 사는 방법을 알려주신 것인지에 대하여 명확하지 않지만 저는 후자의 관점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하신 이 말씀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동양적 사고로 생각하는 영원한 삶은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듯이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것'을 영원한 삶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러한 우리 동양적 사고와 다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는 대대로 존경받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에 따른 삶을 살아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하느님이 존재하심을 알아야 하고 존재하심을 가장 확실히 하는 것은 관념상으로 하느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직접 하느님을 알현해야합니다. 이런 궁극의 단계가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卽見如來이고 이런 분은 예수님과 부처님 등 인류의 위대한 성인들이시며 영원한 생명으로 살고 계신 그분들의 말씀을 기억하고 실천하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임을 묵상하였습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말씀하셨으나
저는 오늘 하루의 삶을 걱정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루살이 삶에서 언제쯤 삶의 전반을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리고 또 언제쯤 영원한 생명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영원한 생명을 살지 못한다 하더라도 후회 없는 삶을 살다가
후회 없는 생을 마감하는 소박한 소망 하나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이런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적은 소망 하나만이라도 이룰 수 있도록
언제나 성령으로 지켜주시옵소서!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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