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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221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8-13 조회수384 추천수3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21ㅡ19,1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19,1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들을 마치시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 건너편 유다 지방으로 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복음은 죄의 용서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묻고 있습니다. 저는 누가 내게 죄를 지으면 많이 용서해 주면 삼시 세판이므로 세 번까지는 용서해 줄 것 같습니다. 만약 제가 예수님께 묻는다면 세 번까지 용서해야 합니까? 하고 여쭸을 것 같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죄의 용서는 끝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불가능한 일을 말씀하시니 이번에는 부처님께 여쭤봐야 겠습니다. "부처님! 죄는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합니까?" 부처님 왈 “그 죄가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가져와 봐라, 내가 그 죄라는 놈을 혼내 줘야겠다.”고 하십니다.

죄라는 놈을 잡아서 부처님께 같다 바치려고 해도 도대체 죄라는 놈이 어댈 갔나 보이지를 않습니다. 빈손으로 부처님께 다시 가니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은 "죄라는 놈은 본디 그 본성이 없는 것이어서 모두가 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하십니다. 이를 천수경의 표현을 빌리면 罪無自性 從心起(죄무자성 종심기)로, 반야심경에서는 一切皆空 (일체개공)에 모두 함축시키고 있습니다. 

저는 최대한 관용을 베풀면 세 번 정도는 용서할 수 있으나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셨으므로 차라리 어느 누구도 내게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마음먹는 것이 더 쉬운 방법일 것 같습니다. 죄라고 규정하는 것은 우리의 인식 작용이므로 인식이 다르면 동일한 행위라 하여도 죄가 되지 않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우리의 인식으로는 민족의 영웅이지만 일본 사람의 인식으로는 테러리스트이어서 사형에 처했습니다.

이를 가지고 일본 사람과 백 날을 논쟁을 하여도 서로 인식이 다르므로 결론이 나지 않습니다.'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고 하신 이 말씀은 이런 인식의 차이를 극복하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도 우리 삶에 좋은 양식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코 용서 받지 못할 죄로는 "사람들이 어떠한 죄를 짓든,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을 하든 다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2.31)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죄의 용서를 말씀하시고 뜬금없이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는 앞 문장이 뒤 문장의 어떤 이유와 근거, 원인이 될 때에 사용하는 접속 부사입니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하늘 나라'에 수렴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그리고 죄의 용서와 임금이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을 같은 뜻으로 말씀하시고 계시므로 어떤 유사성이 있는지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임금에게 빚을 탕감 받은 액수는 만 탈렌트이고, 자신이 남에게 꾸어준 빚은 백 데나리온입니다. 당시 화폐 단위를 알 수 없으나 대략 백만 배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어디에선가 읽어 본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용서받은 것은 이를 금액으로 환산한다면 만 탈렌트이고,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일흔일곱 번 용서한다 하더라도 이를 돈으로 환산하면 고작 백 데나리온에 불과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엄청난 용서를 받고 있으면서도 그 백만 분지 일에 대하여도 용서하지 않으려고 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용서는 무조건 눈감아주는 것이 용서가 아니라 다시는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회개시켜야 참된 용서입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뜻으로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 13)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이런 자들에게 연민을 가지고 자비를 베풀며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저희는 참으로 지키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용서는 할 수 있으나 다시는 상종을 하지 않으려고 작심하는 것이 저희들의 마음이므로 연민을 가지고 더 관심을 가져볼 그런 마음은 생겨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내 자식이라면 가능할 것 같으므로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닌 듯합니다.

하느님은 제게 한없는 은총을 주시고 계심에도 저는 그 은총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 못하고 있음을 반성하며,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것이 하늘 나라로 향해 나아가는 길임에도 죄보다는 오히려 사람을 더 미워하는 어리석음을 늘 반복하고 있으므로 이 또한 반성하며 오늘 묵상을 마칩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은 죄의 용서는 한량이 없다 하셨습니다. 
저희 또한 하느님으로부터 한량없는 죄의 용서를 받고 있음에도
죄의 용서는커녕 사람까지도 미워하고 있사오니
이런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시는 성령님과 늘 함께 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을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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