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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신비주의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09-08-13 조회수1,421 추천수21 반대(0) 신고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연중 19주간 목요일 - 신비주의

 

 

 

저의 동기신부는 자신이 자라면서 아버지에게 야단 한 번 안 맞아봤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가 있는 앞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매우 말썽꾸러기였다고 합니다. 친구 4명이 초등학교 때부터 근방에서 하도 유명하여 경찰들까지 이름을 다 알 정도였다고 합니다. 싸움도 많이 하고 사고도 많이 쳐서 누구도 못 말리는 사고뭉치들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 떨던 무섭던 십대였지만 결혼하여 가족들에게만은 큰 소리 한 번 안쳤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워낙 사고를 많이 치고 다녔기 때문에 자녀에게 뭐라 할 처지가 아닌 것을 본인이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결혼을 해서도 자주 사고를 치셨는데, 한 번은 깡통에 구멍을 뚫고 그 안에 나무에 불을 붙여 넣고 철사 줄을 달아 빙빙 돌리는 대보름 밤에 하는 불놀이를 하다가 아버지가 그 것을 잘못 던져 다른 집 창고에 불을 내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그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이 거 네가 했다고 해라. 잘만 하면 끝나고 맛있는 거 사줄게.”하면서 아들을 훈련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주인들 앞에서 아들을 마구 혼내며, “아이고, 내가 이 놈 때문에 못 살아요. 매일 사고만 치고. 정말 죄송하고 손해 보상해 드릴게요.”라고 하며 엉덩이를 때렸습니다. 아들도 나름 연기를 잘 했습니다. 그래서 창고 주인이, “괜찮아요. 애들이 그럴 수 있죠. 앞으로는 조심해서 놀아라”하고 일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 주인이 보이지 않는 곳에 두 부자가 당도하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잘했어. 아들. 맛있는 거 사 먹으러 가자.”라고 말하고 가게로 들어갔습니다.

모든 부모가 다 그렇지는 않지만 이 아버님은 당신이 자녀들을 야단 칠 처지가 못 됨을 아셨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용서는 몇 번만 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해야 하는 의무임을 일깨워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예화를 하나 말씀하십니다.

왕이 한 신하에게 일만 탈란트를 탕감하여 주었지만 그 종은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둡니다. 그래서 왕도 화가 나서 그 종에게 탕감해 주었던 빚을 다시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두게 된다는 결말입니다.

일 탈란트는 6000데나리온입니다. 일 데나리온은 일꾼의 하루 품삯입니다. 만약 하루 품삯을 50,000원으로 친다면 친구가 빚진 100데나리온은 5백만 원이고, 왕이 탕감해 준 액수는 3조 원에 해당합니다.

3조 원이란 누가 빌려주고 탕감해 줄 액수가 아닙니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께 지은 죗값이고 이는 인간의 힘으로는 갚을 수 없는 액수입니다. 그 죗값을 하느님 스스로 인간이 되어 피를 흘리셔서 대신 갚아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옥에 갈 운명의 인간들이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죄를 용서받고 천국에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5백만 원이란 인간들끼리 서로 잘못하여 짓는 죗값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서로 작은 잘못들까지 용서하지 못한다면 하느님도 ‘정의’상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용서 해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 하시고...”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고해성사를 가만히 들어보면 자신도 많은 죄를 짓고 그것을 하느님께 용서를 받으려고 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까지는 ‘내가 참 죄인임을 깨닫고 있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정의로워 진다는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커다란 자비를 입었으니 나도 자비를 베푸는 것을 당연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사실 용서해서 더 편안해지는 사람은 본인 자신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미움 때문에 몇 배의 고통을 더 받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용서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많은 경우 다른 사람이 직접적으로 나에게 잘못을 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하는 행동이나 말이 마음에 안 들어 그냥 미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사람을 판단하고 미워하는 것은 내 안에 죄가 있어서 그 죄책감을 상쇠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죄인으로 만드는, 어쩌면 다른 사람을 미워하면서 자기 합리화를 하는 것입니다. 혹은 내가 내 안에 누르고 있는 것들을 그 사람이 자유롭게 사는 것을 보고 화가 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결국 감추어진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 됩니다.

심판은 하느님에게 맡겨드립시다. 유일한 심판관은 하느님입니다. 우리가 판단하는 것 자체가 이미 하느님의 위치에 있는 교만입니다.

 

얼마 전에 눈이 가장 아름다운 배우로 프랑스의 이사벨 아자니가 뽑혔습니다. 그 이유는 눈빛이 매우 신비롭고 아름답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사벨의 눈이 신비로운 이유는 눈이 좋지 않아 초점이 맞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눈이 잘 안 보이지만 그냥 굳이 얼굴을 찌푸려가며 초점을 맞추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기 때문에 남들이 볼 때는 눈이 아름답고 신비롭게 보이는 것입니다.

유명한 인상주의 화가 모네의 작품 중 ‘수련’이란 작품은 그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명작으로 치고 있습니다. 모네는 나이가 들면서 시력을 점점 잃어갔습니다. 이 수련이란 작품도 정원을 눈이 안 좋은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 보고 그린 것입니다. 굳이 보이는 것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리면 그것 또한 인상적이고 아름다운 예술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고 판단하고 초점을 맞추려하기 때문에 눈이 찌푸려지고 보이는 사람도 또 보는 나도 추하게 되고 그렇게 주름이 늘어가는 것입니다. 초점을 맞추고 판단하는 것은 주님께 맡겨드립시다. 그리고 우리는 있는 그대로 보고 판단하지 맙시다. 그러면 신비로운 세계가 열리고 나까지 신비롭고 아름다워집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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