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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삶과 거룩함/자선의 사회적 관점들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09-08-19 조회수427 추천수1 반대(0) 신고
 
 
자선의 사회적 관점들 

그리스도교적 자선(charity) 은 자주 피상적으로 이해되곤 한다.
마치 부드러움, 상냥함,
친절함이 전부인 것처럼 여겨진다.
자비는 당연히 이 모든 것을 포함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넓은 개념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자선을 그저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으로
 국한시키는 것은 우리 시각이 편협하고,
우리와 같은 혜택과 위안을 받는 사람만을
이웃에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개념은 우리의 사랑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
 다시 말해 불행한 이, 고통받는 이, 가난한 이,
버림받은 이, 또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아 이들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더 많이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당당히 요구해야 하는 사람들을 교묘히 제외시키고 있는 것이다.

정의가 없는 자선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너무 자주 자선을 일종의 도덕적인 사치로 생각해서
그 실천 여부를 우리가 선택할 수 있고
하느님의 눈에 우리를 선한 사람으로 비추게 하는 것인 동시에
'선한 일'을 해야 한다는 내적인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으로 여기곤 한다.
그런 자선은 미성숙한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완전히 비현실적인 것이다.
진정한 자선은 사랑이다.
사랑은 이웃의 결핍에 대한 깊은 관심을 내포한다.

그것은 도덕적으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엄연한 의무인 것이다.
그리스도와 성령의 법에 의해, 우리는 우리 형제들의 곤궁과
무엇보다도 그들이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 사랑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의무가 있다.
계층과 국가와 인종들 간의 관계에서 사랑의 부족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가!
가장 불행한 일은 이런 사랑의 결핍 현상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 안에서
너무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그리스도교는 불의와 증오를 정당화하도록
 지속적으로 요구받아 왔다.

복음서에서 보면 그리스도는 최후의 심판 때에
자선 행위를 구원의 최종 잣대로 삼을 것이라 말씀하신다.
굶주린 이를 먹여 준 사람과 목마른 이의 목을 적셔 준 사람,
이방인에게 잠자리를 내어 준 사람,
병든 이와 감옥에 갇힌 이를 방문한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셨다.
그들은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베풀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굶주린 이들에게 빵을 나누어주지 않는 사람,
목마른 이들의 목을 적셔 주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베풀지 않는 이들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

이 말씀과 사도 요한의 첫째 편지에서 보듯이,
그리스도교적 자선은 구체적이고 외적인 사랑의
행위가 수반되지 않는 한 아무 의미가 없다.
자신의 소유물과 시간,
 아니면 최소한 관심이라도 자기보다
불행한 이들을 돕는 데 쓰지 않는 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름값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희생은 실질적인 것이어야 한다.

오만하게 온정을 베푸는 척 하며,
'가난한 이들'에게 선심을 쓰면서
자신의 자아를 부풀리는 거만한 태도는 자선이 아니기 때문이다.

재화를 나눌 때에는 마음도 함께 나누어 공동의 불행과 가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애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자선은 마음이 가난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으로,
그렇게 해야만 불행하고 혜택받지 못하는
가난한 이들과의 동질성을 가질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다수의 불행한 이들과 나누기 위해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할 때도 있다.

더 나아가 자선에 대한 근시안적이고 잘못된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자선을 형식적으로만 하게 만들어 선의를 표시하기 위한
상징적인 행동에 그치게 할 수 있다.
 
이런 자선은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 실질적인 효과가 없다.
그것은 다만 사회적 불의를 눈감아 주고 상황을 있는 그대로 유지시킬 뿐이다.
가난한 이들을 가난하게 만드는 데 협조한다는 뜻이다.

현대에 와서 가난과 고통은 모든 이들의 관심사가 되었다.
가난과 고통은 세계 도처에 퍼져 있다.
심지어 부유한 나라에도 이 불행은 만연하여,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는 이 불명예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오히려
빠르게 발전하는 세상이 낳은 무능력과 불의와
경제 사회적 혼란 때문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우리는 무기력하고
 상황을 개선시킬 건설적인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자선과 정의의
이름으로 져야할 의무다.

최소한 우리는 상황을 올바로 인식하고
그것이 제시하는 문제들과 관련해 양심을 다듬어야 한다.
이 세상의 문제를 한 사람이 모두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고통과 가난을 줄이는 데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는 경우를 깨달아야 하며
자신이 고통과 가난을 지속화하고 부채질 하는 데
은밀히 협조하고 있을 경우가 어떤 때인지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교적 자선은
사회 정의와 연계되지 않는 한 결코
 현실화될 수 없는 것이다.

수백만 명이나 되는 그리스도인의
잠재적인 구성원들이 겪는
고통, 가난, 질병과 때 이른 죽음에 관해
아무런 관심이 없다면
신비체와 성스러운 전례에 관한
연구가 무슨 소용인가?

우리는 가난과 고통이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프리카, 남미와 아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깨닫고 이해한다면
그렇게 마음이 편안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 영역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에까지
눈을 돌릴 필요 없이 도시의 빈민가와
사회적 혜택이 미처 돌아가지 않은
시골에서 수없이 많은 인간적인 고뇌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과연 무엇을 하고있는가?

호주머니에서 몇 푼 꺼내 건네주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내주어야 한다.
자선에 내포된 이 깊은 뜻을 발견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그리스도적 완전함의
온전한 깊이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사도 야고보는 그의 편지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부자를 존경하고 가난한 이들을 멸시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우리 자신을 가난한 이들과 동일시하고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듯이
스스로 가난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가령 여러분의 모임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누추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온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을 쳐다보고서는
 
'선생님은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하거나
'내 발판 밑에 앉으시오.' 한다면,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악한 생각을 가진 심판자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들을 업신여겼습니다.
 여러분을 억누르는 사람들이 바로 부자가 아닙니까?
여러분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자들도 그들이 아닙니까?
여러분이 받드는 그 존귀한 이름을
모독하는 자들도 그들이 아닙니까?"(야고 2,2-7)

같은 편지에서 사도 야고보는
가난한 이들의 돈을 착취하여
 부정하게 부를 축적한 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잘라 말하고 있다.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대들의 옷은 좀먹었습니다.
그대들의 금과 은은 녹슬었으며,
그 녹이그대들을 고발하는 증거가 되고 불처럼
그대들의 살을 삼켜 버릴 것입니다.
그대들은 이 마지막 때에도 재물을 쌓기만 하였습니다.
 보십시오. 그대들의 밭에서 곡식을 벤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곡식을 거두어들인 일꾼들의 아우성이
 만군의 주님 귀에 들어갔습니다.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사치와 쾌락을 누렸고,
살육의 날에도 마음을 기름지게 하였습니다.
그대들은 의인을 단죄하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대들에게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야고 5.2-6)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기 위해
우리는 서로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을 대하듯 이웃을 대하고,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웃에게 베푸는 것을 말한다.
이 소망은 다른 이들을 도우려는 구체적인 행동이 없는 한 아무 의미가 없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강론에서 자주 소개되곤 한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상처입은 사람을 도랑에 버려 두고 간 사람은 성직자와 레위들이었다.
그를 도운 사람은 겸손한 이방인이었다.  우리는 어느쪽인가?
성직자인가, 레위인인가, 아니면 사마리아인인가?


「삶과 거룩함」에서
Thomas Merton 지음 / 남재희 신부 옮김 / 생활성서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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