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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09-08-19 조회수931 추천수10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09년 8월 19일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Am I not free to do as I wish with my own money?
Are you envious because I am generous?
(Mt.20.15)
 
 
제1독서 판관 9,6-15
복음 마태오 20,1-16
 
 
청바지 차림을 한 신사가 은행 출입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그는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은행 측과 투자에 대해 의논하려고 찾아온 사업가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담당자가 없어서 만나지를 못했지요. 그래도 꼭 만나고 가야겠다 싶어 한 시간을 기다렸으나 여전히 담당자가 오지 않아 결국 내일 만나야겠다고 생각하고 은행 문을 나섰습니다.

잠시 후 이 신사는 다시 돌아와 은행 직원에게 주차권 도장을 찍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 도장이 없으면 주차료를 물어야만 되니까요. 그런데 직원은 단호하게 그리고 일언지하에 거절을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여기서 저축을 하거나 인출하신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은행 방침에 따라서 도장을 찍어줄 수 없습니다.”

청바지 신사는 “담당자가 없어서 한 시간 씩이나 기다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도장을 찍어주십시오.”라고 강력하게 말했지요. 그러나 직원은 역시 단호하게 “안 됩니다.”만을 외칠 뿐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무척 기분이 상한 상태에서 은행 문을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음 날 이른 아침, 그 은행에 예금해 놓았던 수백만 달러를 모조리 찾아서 다른 은행으로 가져가버렸다고 하네요.

이 사람은 IBM 회장이었던 존 에이커스였습니다.

은행 직원은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최선의 행동이 자기 은행의 최고 고객을 잃어버리는 최악의 행동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기의 판단이 늘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자기의 판단의 굴레에서 좀처럼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틀리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요.

오늘 복음을 보면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에게 일당을 주는 포도밭 주인의 모습이 나오지요. 그런데 약간 특이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아홉시부터 일한 사람이나, 열두 시, 세 시,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섯 시부터 일한 사람이 모두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공평한 주인이 있을 수 있을까요? 일한 시간이 다르다면 차등을 두고서 일당을 줘야 공평한 것이지, 어떻게 모두 똑같이 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판단입니다. 하느님의 판단은 차별 없이 똑같이 나누어주는 사랑이거든요. 그래서 인간적인 기준을 뛰어넘는 그 사랑에 우리는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의 기준에서만 판단합니다. 만약 내가 다섯 시부터 일한 일꾼이었다면 이와 같은 처사를 체험하면서 공평하고 사랑가득한 분이라고 말했겠지요. 반대로 내가 아홉 시부터 일했다면 그분의 사랑을 보려 하지 않고 아마 악덕 기업주로 몰아갈 것입니다.

우리의 판단이 아닌, 주님의 판단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즉, 사랑이 가득한 주님의 판단을 따르는 주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사하면서 이 세상을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꿈을 품고 무언가를 할 수 있다면 그것을 시작하라.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용기 속에 당신의 천재성과 능력, 그리고 기적이 모두 숨어 있다.(괴테)




로메로 주교님의 기도

가끔 뒤로 물러서서 멀리 내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 노력으로 세워지지 않는 나라일 뿐 아니라
우리 눈길로 가서 닿을 수도 없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다만, 하느님이 하시는 거대한 사업의
지극히 작은 부분을 평생토록 감당할 따름이지요.
우리가 하는 일 어느 것 하나 완전하지 못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 손길이 미칠 수 없는 저 너머에 있습니다.
어느 선언문도 말해야 할 내용을 모두 밝히지 못하고
어느 기도문도 우리의 모든 소원을 담지 못합니다.
어느 고백문도 옹근 전체를 싣지 못하고
어느 방문도 돌봐야 할 사람을 모두 돌보지 못합니다.
어느 계획도 교회의 선교를 완수 못하고
어느 목표도 모든 것에 닿지 못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는 일이에요.
어느 날 싹틀 씨를 우리는 심습니다.
그것들이 가져다줄 미래의 약속을 생각하며,
우리는 뿌려진 씨들 위에 물을 주지요.
그 위에 벽돌들이 쌓여지고 기둥들이 세워질
내일의 건물에 기초를 놓고,
우리 힘으로는 해낼 수 없는 효과를 내다보며
반죽에 누룩을 섞습니다.
우리는 만능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할 수 있는 만큼 할 때
거기에서 해방감을 느낄 따름이에요.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게 합니다.
턱없이 모자라지만, 이것이 시작이요
하느님 은총을 세상에 임하도록 하는 걸음입니다.

아마도 우리는 끝내 결과를 보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그것이 건축가와 목수들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건축가가 아니라 목수들입니다.
메시아가 아니라 사제들이에요.
우리는 우리 것이 아닌 미래를 내다보는 예언자들입니다. 아멘.
 
 
 

Liszt - Consolation No.3 in D Flat maj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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