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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깨어 있음과 종의 비유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9-08-27 조회수520 추천수3 반대(0) 신고
 
 

깨어 있음과 종의 비유 - 윤경재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주인이 종에게 자기 집안 식솔들을 맡겨 그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게 하였으면,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마태24,42-51)

 

 

깨어 있으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셨나요? 저는 절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일주문을 지키고 선 사천왕상이 떠올랐습니다. 사천왕상은 왕 방울 같은 눈알을 부라리며 양손에 칼이나 창, 주먹, 보탑 등을 쥐고 서 있습니다. 수미산 중턱에서 불법을 지키려고 동서남북 네 방향을 막아선 데서 유래하였답니다. 사천왕상은 절의 첫 관문인 일주문에 자리 잡고서 잡귀를 막으며 출입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을 다잡는 역할을 합니다. 가끔 그 곁을 지나가는 어린아이들은 눈알을 부라리는 모습에 놀라서 울기도 합니다. 하필 경건한 절 입구에 이런 무시무시한 상을 두었나 하고 의구심이 들겠지만 어떤 뜻이 있을 겁니다.

절의 한가운데 대웅전에 모신 부처님 상은 온화하고 인자한 모습이어서 그 앞에 서면 모든 근심과 고통이 다 사라질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 상 앞에 경의를 표하고 절을 하게 됩니다. 또 그분의 가르침을 들으려 경전을 익히고 수행을 합니다. 그러나 그 앞에 다가가기 전에 누구나 반드시 일주문을 거쳐야 하고 거기서 사천왕상과 맞닥트려야 합니다. 부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누구나 거쳐야 할 일이 있다는 뜻일 겁니다. 부처님 말씀을 제대로 듣기 전에 어떤 자세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사천왕상은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온갖 번뇌 망상을 끊어 버리고 어리석음과 욕심과 부끄러움에 물든 자신을 되돌아보라는 뜻으로 세운 것입니다. 자비와 보시의 깨달음에 이르려면 자신의 내면을 살펴보고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신 안에서 벌어지는 죄상을 감추거나 속여서는 안 되고 정면으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의미에서 깨어 있으라는 요청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깨어 있음의 의미에는 한 가지가 더 녹아 있습니다. 바로 종의 이미지입니다. 깨어 있음과 종의 비유가 하나로 연결되었습니다. 종은 아무 소유권이 없는 자입니다. 주인의 일을 수행한 결과에 대해 어떤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없습니다. 일을 마무리 지었다는 그 자체에 의미가 있지 일을 수행해서 얻은 열매를 제 것으로 주장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사정은 일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적용됩니다. 

특히 인간관계에서 우리가 힘들어하는 이유가 지나치게 지배와 소유권을 주장하는 데에 있습니다. 스스로 아무것도 주장할 것이 없다는 종으로서 역할을 인간관계에 적용한다면 갈등과 분쟁과 억울함이 없을 터인데 그렇지 못합니다. 종으로서의 역할은 아무리 부부 사이와 부모자식 간이라도 서로에게 당연한 듯이 요구할 권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어떻게 해주었으니 너도 어떻게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요구할 근거가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모두 종이고 주님만이 주인이시듯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하관계가 없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평등관계입니다. 또한 하느님과 나 사이에 성령께서 주님으로 관여하시듯이 너와 나 사이에도 성령이 관계하고 있습니다. 너와 내가 직접 맺어 하나로 엉겨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성령께서 계서서 연결 지어 주십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나의 권리는 하나도 없으며 모두 성령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주인이 종에게 자기 집안 식솔들을 맡겨 그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게 하였다.”라는 종의 비유를 올바로 알아듣는 것입니다. 내 것을 내어 주는 것이 아니라 맡겨주신 것을 내주는 것입니다. 

두 마리 고슴도치가 있었습니다. 날씨가 추워서 서로 온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서로 포옹하여 체온을 나누려 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가시에 찔려 고통스럽고 그렇다고 멀어지면 있으나마나이었습니다. 아니, 너 때문이라는 원망이 생겨 다투고 미워하기만 했습니다. 숫제 없느니만 못했습니다. 자기 몸에 난 가시를 인정하지 못하고 남 탓만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몸에 난 가시가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도 체온을 나눌 방안을 모색하여야 했습니다. 그 방안이 바로 서로 종이 되어 주고, 우리의 주인이신 분을 둘 사이에 모셔두는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사랑이시고, 진리이시고,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부와 성자를 하나로 맺어 주셨듯이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다른 피조물을 맺어 주십니다. 특히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주님으로 와 계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나와 너 사이에 종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며 성령을 주인으로 모셔야 한다는 비유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는지 돌이켜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저 끈적끈적하게 긴밀히 맺어야 좋은 줄로 알고서 그동안 “우리는 하나다.”라는 공염불만 줄기차게 외치고 다녔습니다. 그리고는 아무런 상처도 받지 않았던 것처럼 가식하며 살아왔습니다. 성령께서 주인으로 계시지 않는 관계는 실상 왜곡된 관계일 뿐입니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기만 하는 관계입니다. 

깨어 있되 주님의 종인 처지를 비유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충정을 얼마나 깨달았는지, 오늘 다시금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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