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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간과 똑같이 고통을 겪으시는 하느님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9-08-31 조회수413 추천수4 반대(0) 신고
 
 

인간과 똑같이 고통을 겪으시는 하느님 - 윤경재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루카 4,16-30)

 

 

오늘은 전례력으로 연중 22주간입니다. 오늘부터 평일 복음 말씀으로는 루카복음 4,16절에서 시작하여 21,36절까지 읽습니다. 연중 마지막 토요일까지 루카복음서를 선포합니다. 예수께서 나자렛 고향 회당에 오셔서 선포하신 첫 내용은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선포의 자세가 다른 예언자나 율법학자들과 사뭇 달랐습니다. 이사야 예언서 두루마리를 건네받자 특정한 내용을 찾아 읽으시고는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라고 확신에 찬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루카저자는 특히 처음 시작한다는 뜻이 담긴 ‘아르코(archo)’라는 동사를 문장 첫머리에 사용하여 예수님의 복음 선포가 장엄하게 열렸다고 알려줍니다.

예수께서 인용한 성경구절은 이사야 61,1-2절 내용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단순히 성경 구절을 인용하시고 선포하시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의 내용이 ‘오늘 너희의 귀 안에서 풍성하게 이루어졌다.’라고 열매 맺었음을 확정적으로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고향 사람들이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듣기에 뉘앙스가 달라도 지나치게 달랐습니다. 말씀이 실현되었다는 선언이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난 금요일 오금동 본당에서 신교선 신부님의 특강이 열렸습니다. ‘치유와 감사’라는 주제로 교우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유머를 섞어가면서 예수님의 치유 기적 내용을 설명하셨습니다. 한 시간 반이 어찌나 금세 지나가는지 지루할 틈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핵심을 전달해 주시려고 갖은 정성을 쏟아주셨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 병자 치유와 구마를 거절하신 적이 없으며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주셨습니다. 이때 병자에게 요청되는 자세는 겸손과 내어맡김이며, 이러한 치유기적이 언제나 일어나는데도 막상 우리는 깨닫지 못한다 하셨습니다. 막상 기적을 기적으로 깨닫지 못하는 까닭은 감사할 줄 모르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기적은 당사자가 받아들일 수 있게 단계적으로 이루어질 때도 있으며 한꺼번에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인간이 느끼는 고통을 예수께서는 잊으신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우리 신부님’이라는 소설에서 돈 카밀로 신부가 십자가에 매달려 계시는 예수께 갖은 불평을 해대자 ‘나는 이천여 년 전부터 이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린 채 한 번도 내려간 적이 없었다.’라고 응답하시는 장면을 예로 드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불평불만을 하나도 마다치 않으시고 다 들어주셨습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사야 61,2절 ‘주님의 은혜로운 해’라는 히브리어를 설명하시며 새로운 시각을 열어 주셨습니다. 우리말로는 ‘주님의’라고 소유격으로 간단히 번역하였지만, 여기에 쓰인 히브리어 불분리 전치사 ‘ל’의 뉘앙스를 새겨보면 약간 다르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느끼는 가난과 억압과 눈 멈과 병고를 하느님께서 똑같이 겪으시고 느끼시다가 다 풀어주신다는 의미가 담겼다는 것입니다. 즉, 히브리 사람들은 이 구절을 ‘주님에게(도) 은혜로운 해’라고 여격으로 받아들인다는 난해한 설명을 덧붙여 주셨습니다. 성서학 신학박사님의 눈인지라 새롭게 들렸습니다.

레위기25,10절 등 구약에서 선포되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잘 지켜지지 않았던 희년의 성격이 인간의 병고와 고통에 동참하시는 하느님께서 몸소 베푸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희년을 주님께서 강생하시어 성부 대신으로 ‘오늘’에 완성되었음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헛되이 공수표가 될 리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 못 박혀 고통받고 계시는 까닭은 아직도 가난하고 억압받으며 병고에 눌린 사람들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전히 그런 악행을 저지른다면 예수님을 계속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것입니다. 점점 깊숙이 박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벼랑 끝에 밀어 떨어뜨리려고 한 고향 사람들의 행동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속 한가운데를 가르고 지나가실 것입니다. 

희년 선포가 주님께서 아파하시기에 나오는 것임을 모르는 채, 십자가 아래에 선 우리는 여전히 마음속이 갈라지는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십자가를 무슨 상징물인양 쳐다볼 뿐입니다. 심지어 장신구처럼 금붙이로 만들어 목에 걸고 다닙니다. 예수님의 신음과 탄식을 외면한 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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