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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236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9-01 조회수385 추천수2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31-37

그때에 3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32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3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34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3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 36 그러자 모든 사람이 몹시 놀라,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하며 서로 말하였다. 37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나자렛 고향마을에서 생명의 위협까지 느낀 예수님은 카파르나움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두 가지 사실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말씀에 권위가 있었다 하신 점이며 둘째는 마귀가 물러가며 했던 짓을 통하여 마귀에 걸린 사람에게는 잘못이 없으나 잘못을 행한 것은 마귀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던 것은 다른 사람들의 가르침과는 달라서 말씀이 살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살아있는 말씀만이 감동을 줄 수 있으므로 권위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동안 그들이 수없이 들어왔던 성경 말씀은 이제 더 이상 신선한 생동감이 없으며 이미 박제화 된 상태이기 때문에 생명력을 느낄 수 없으므로 그 어떤 권위도 느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성경 말씀만을 반복하여 얘기한들 그것은 성경 말씀에 불과하고 권위가 있다면 성경이 권위가 있는 것이며 말하는 당사자가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를 받은 지 3년이 지나면 복음서의 구절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미사 때마다 봉독하는 복음은 사실 몇 구절 되지 않습니다. 복음 말씀을 반복하여 묵상하는 제 자신도 어느 때는 동일한 주제를 가지고 반복하는 것 같아서 한계를 느끼고 있으므로 복음을 강론하시는 신부님들의 강론 준비의 어려움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좋은 소리도 한두 번이고 허구한 날 자비와 사랑만을 얘기할 수도 없으므로 여간 어려움이 따르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달리하면 강론의 소재는 무궁무진할 것 같습니다. 우리 현실과 복음 말씀과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우리 사회의 실상과 복음 말씀과 대비하여 강론하면 소재는 무궁무진하지만 이런 점을 강론하지 않는다면 강론 소재도 빈곤할 뿐 아니라 살아 있는 말씀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자비와 사랑과 평화는 그동안 수없이 들어왔기 때문에 전혀 새로울 것도 없고 감동도 없으므로 사실 강론 말씀에서 어떤 특별한 권위를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권위는 순종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권위가 있다면 순종을 하지 말라고 하여도 순종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순종을 얘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사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서 모두 순교하였습니다. 바로 이처럼 순종은 참된 권위를 느낄 때에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며 순종은 서약으로 맹세하는 그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참된 권위는 마귀마저도 순종시키고 있습니다. 이처럼 권위는 강요된 권력과 차별되는 것으로 자발적인 수용을 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이런 참된 권위는 찾아볼 수 없고 높은 자리에서, 높은 지위에서 권위가 나오는 것으로 착각들 하고 있으므로 진정한 권위는 찾아 볼 수 없고 권위주의만 있습니다. 이러한 권위주의 때문에 그나마 인위적으로 설정한 권위적인 자리마저도 이제는 욕먹는 자리로 타락해 가고 있습니다. 그 누가 뭐라고 한들 우리 마음속에는 '너나 잘해' 이런 마음이 자리 잡고 있으므로 우리 모두의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권위의 원천은 진실입니다. 외국의 유수 언론이 권위가 있는 것은 진실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권위가 있었던 것은 진실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으며 이런 진실 된 말씀만이, 진리의 말씀만이 우리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그릇된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주일 복음에서는 이런 그릇된 것으로는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마르 7, 21-22)등으로 열두 가지를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권위 있는 말씀으로 마귀도 순종시켰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특이한 점은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람과 그 사람 속에 기생하는 마귀는 분리해서 판단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미워할 대상은 그 사람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마귀들이며 그 사람 자체가 아님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이를 우리가 미처 깨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까지 정죄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의 의미가 더욱 명료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면 일흔 일곱 번이 아니라 천번 만번이라도 용서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 일은 그 사람 속에서 기생하는 마귀가 하고 있으므로 그 사람이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그 사람 속에 기생하는 마귀가 못된 짓을 하고 있으므로 그 사람을 정죄한다 하여도 그 마귀는 몸을 피해 다른 사람의 몸속으로 들어가 기생하며 여전히 못된 짓을 할 것입니다. 그 마귀를 쫒아내야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할 수 있으며 사람을 정죄해서는 불가능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신종플루에 감염되었으면 감염된 바이러스를 치료해야 하며 감염된 사람들을 정죄할 수 없는 것처럼 마귀도 이와 같음을 알았습니다. 마귀에 걸린 사람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은 주님의 진실 된 가르침으로 치유할 수밖에 없으며 우리도 마귀에 감염되지 않기 위해서는 주님의 가르침을 기억하여 실천해야 하므로 우리 교회의 사명이 막중함을 끝으로 오늘 묵상을 마칩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은 권위로 마귀까지 굴복시켰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땅에서는 불행하게도 어떤 권위도 찾아 볼 수 없고
권위주의만 팽배해 있습니다.
하여 저희 자신들 속에 기생하는 마귀를 치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희는 마귀를 몰아낼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하고
마귀가 기생하는 불쌍한 사람들을 정죄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권위의 성령님을,
그리고 사람은 그 누구나 사랑하되 그를 괴롭히는 마귀를 쫓아낼 줄 아는
지혜의 성령님을 보내주시옵소서!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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