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십자가 신앙 [나약함 안에서 드러나는 참된 힘]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09-09-01 조회수638 추천수3 반대(0) 신고

 

성 바오로의 개인적 체험 속에는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사실이 있습니다. 처음에 그는 강압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사람이었지만,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회개한 이후로 그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편이 되어, 그분이 자기 삶의 이유가 되고, 설교의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의 삶은 숨은 위험과 어려움을 모면하지 못하고 한시도 차분할 틈 없이, 영혼들을 위해 완전히 불타버린 삶이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십자가의 중심적 의미가 그에게 명백해 졌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위해 그리고 바오로 자신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두 가지가 다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모두를 위해 참으로 죽으셨다는 보편성과, 그분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주관성 말입니다. 따라서 십자가 안에서 조건 없는 사랑과 하느님의 자비가 나타났습니다.

이 사랑을 바오로는 무엇보다 자신 안에서 체험하며 죄인에서 믿는 이로, 박해자에서 사도로 바뀝니다. 하루 하루, 그의 새로운 삶 속에서, 구원이 ‘은총’이라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즉 모든 것이 자신의 공로가 아닌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왔으며, 그것을 빼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체험했습니다. “은총의 복음”은 그에게 십자가를 이해하는 유일한 방식이 되었으며, 자신의 새로운 존재의 범주일 뿐 아니라, 그에게 질문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대답이기도 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자신들의 공로에 희망을 걸고, 그것에서 구원을 기대하던 유다인들도 있었고, 십자가에 대해 인간적 지혜로 대적하던 그리스인들도 있었고, 또 자신들의 삶의 모델에 따라 그리스도교에 대한 자신들의 개념을 구성했던 이단자 그룹들도 있었습니다.

성 바오로에게 십자가는 인류 역사 속에서 근본적으로 첫째 자리였습니다. 십자가는 그의 신학에서 초점이었습니다. 십자가라는 말은 모든 피조물에게 주어진 은총으로써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주제는 사도의 설교에 있어서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요소가 되었습니다. 가장 명백한 예는 고린토 공동체에 관한 것입니다. 혼란과 걸림돌이 걱정스럽게 존재하는, 분파로 인해 친교가 위협받고 그리스도의 몸의 일치를 저해하는 내적 분열이 있는 하나의 교회 앞에서, 바오로는 고상한 말이나 지혜로 자신을 소개하지 않고,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선포를 소개합니다.

그분의 힘은 설득력 있는 어투가 아니라, 모순적으로, “하느님의 권능”에만 의지하는 사람의 약점과 떨림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십자가가 표현하는 모든 것 때문에, 즉 담고 있는 신학적 메시지 때문에, 걸림돌이며 어리석음입니다. 사도는 충격적인 힘으로 그것을 확인합니다. 그분의 말을 직접 듣는 것이 좋겠습니다.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복음 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1고린 1,18-23)

바오로가 이렇게 말을 하던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예수님이 이미 부활하시고 살아계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도는 코린토와 갈라티아 사람들 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부활하신 그분은 바로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분 이시라는 것을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십자가의 ‘걸림돌’과 ‘어리석음’은 실패와 아픔과 패배 만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곳에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의 권능 전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표현이며, 사랑은 외적인 나약함 속에 드러나는 참된 힘이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에게 십자가는 함정 혹은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입니다. 그것은 성경 안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의 신앙을 방해하는 그 무엇처럼 보입니다.

바오로는 대단한 용기를 가지고, 위험이 너무나 크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유다인들에게 십자가는 놀라운 기적으로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 하느님 자신의 본질에 대한 모순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깊은 회개가 일어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다인들이 십자가를 거부한 동기가 계시 속에 곧 선조들의 하느님에 대한 충성에 있다면, 그리스인들 곧 이교인들에게는 십자가에 반대하는 판단의 근거가 이치였습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십자가가 역병, 어리석음, 글자 그대로 싱거움 즉 소금 안 든 음식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류라기 보다는 좋은 의미로 모욕인 것이지요.

바오로는 여러 차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선포를 중요성이라고는 없고 논리적인 이성의 차원으로도 대접할 가치가 없어서 ‘싱겁다’고 판단하여 배척해버리는 쓰라린 체험을 했습니다. 그리스인들처럼 영적인 완전함, 순수한 사고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공간과 시간의 모든 한계 속에 뛰어들어 사람이 되신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하느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을 믿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 논리가 우리 시대의 보편적 논리임을 봅니다. 초연함, 무관심, 하느님 안에서 고통의 부재라는 개념이 어떻게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고, 패배하셨다는 것, 나아가 부활하신 존재로 살기 위해 몸을 취하셨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말을 했을 때,“그 점에 관해서는 다음에 다시 듣겠소.”라고 아테네 사람들은 바오로에게 말합니다. 감옥살이와 같은 육신에서 해방되는 것을 완전함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어떻게 다시 몸을 취한다는 것을 일탈이라 여기지 않겠습니까? 고대의 문화 속에는 육화하신 하느님의 메시지를 위한 공간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사건 전체가 한 마디로 싱거운 모순이었으며, 십자가는 그 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핵심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 바오로는 바로 이 십자가의 말씀을 왜 설교의 근본핵심으로 삼았을까요? 대답은 어렵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사람의 힘과는 다른 ‘하느님의 힘’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분 사랑을 드러냅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1고린 1,25)

바오로 이후 많은 세월이 흘렀고, 우리는 역사 속에서 십자가에 반대되는 지혜가 아니라 바로 십자가가 승리했음을 봅니다. 십자가는 지혜입니다.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까지 이르는 사랑의 힘, 곧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를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지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보기에 언뜻 약점인 것 같은 방법과 도구들을 이용하십니다. 십자가는 한 편으로 사람의 약함을 드러내고, 다른 편으로는 하느님의 참된 힘, 곧 조건 없는 사랑을 나타냅니다. 바로 이 완전한 무상의 사랑이 참된 지혜입니다.

이것을 성 바오로는 자신의 살 속에서 체험하고, 자신의 영적 여정의 온갖 과정들 안에서 증언했으며,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모든 제자에게 정확한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을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사도는 이 정도까지 자신을 그리스도와 일치합니다. 그리고 많은 시험들 속에서, 자신을 사랑하여, 자신과 모든 이의 죄를 위해 스스로를 내어주신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믿음으로 삽니다.(참조 갈라 1,4; 2,20) 사도의 이런 자전적 내용이 우리 모두에게 패러다임(인식의 체계)이 됩니다.

성 바오로는 고린토2서에서 십자가 신학의 놀라운 요약을 제시합니다.그 속에 두 가지 근본 제안이 담겨있는데, 한 편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죄로 여기시어 모두를 위해 죽게 하셨으며, 또 한편 하느님은 우리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하게 하셨습니다. 이 “화해의 임무”로 인해 모든 노예살이는 이미 풀렸습니다.

여기서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삶에 중요한 임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우리도 이 “화해의 임무”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건 언제나 자신이 더 나은 존재라는 사실을 포기하고 사랑의 어리석음을 선택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합니다. 성 바오로는 화해의 임무 곧 십자가가 우리 모두에게 구원이라는 사실을 선포하는 임무에 자신을 온전히 바침으로써 자기 생명을 포기합니다. 우리 역시 그렇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의 겸손 안에서 우리 힘을 발견할 수 있으며, 하느님의 힘으로 들어가기 위해 자신을 포기하는 약점 속에서 슬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참된 슬기 위에 자기 삶을 구성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우리 모두가 “나를 사랑하여, 나에게 자신을 내어주신” 하느님이라 부를 수 있는 그 분에 대한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 베네딕토 16세 교황님 / 일반알현 강론말씀 >

..............................................................................................................................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